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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2. 2016

소설가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세계

소설 <우리가 좋아했던 것> 그리고 EPL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 감독

토요일, 잉글랜드 축구클럽 '아스날'의 경기를 보다

주말엔 역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이다. 난 오래전부터 영국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가 소속된 리버풀 팬이지만, 작년 그의 미국 이적으로 들풀처럼 이 팀 저 팀 떠다니며 팬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어젠 아스날의 시즌 경기를 재방송으로 봤는데, 최근 잘 나간다 싶었더니 라이벌 토트넘과 무승부를 거두고 말았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가리 없이 축구하는 건 여전하다. 내가 EPL을 보기 시작한 이래(난 티에리 앙리가 아스날을 떠난 이후부터 EPL을 본격적으로 시청했다.) 한 번도 절대 강자인 적이 없었던 아스날은 이번 시즌도 밋밋하다. 매번 리그 4위(작년엔 무려 2위)에 컵 대회엔 결승에서 미끄러지는 팀 아스날. 챔피언스리그는 매번 나가서 16강 탈락이라는 애매모호한 성적으로 강팀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만년 언저리 신세. 결국엔 조별리그의 힘겨운 투쟁이 무색해질 만큼 세계의 강팀들에게 먹혀버리는 초식동물 아스날이다. 이 팀을 이끄는 감독 아르센 벵거 (Arsene Wenger)는 바로 이 밋밋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학자 스타일의 외모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원 경제학 석사라는 이력이 보여주듯 철저하게 계산적인 전술로 팀을 이끈다. 그의 축구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가장 적절한 패스 위주의 우아한 축구이며, 승과 패에 상관없이 자신의 축구를 하면 만족한다며 수줍게 미소 짓는 낙관주의자다. 이제 선수들마저 아르센 벵거를 닮아 매년 병원 신세를 지고, 실력이 조금이라도 늘어 세계적인 선수가 될 것 같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빅클럽으로(예를 들면 바르셀로나) 이적해버린다. 왜냐면 아르센 벵거 밑에선 우승하긴 글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선수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스날을 지루한 팀(무리뉴는 패배 전문가라고 벵거를 비난했다.)이라 부른다.

EPL 아스날의 명감독 아르센 벵거

아스날의 일정한 성적(정상 주변에서 추락)은 아르센 벵거 특유의 성격에 기인한다. 그는 전술적인 완성도라는 명목으로 승부를 걸지 않음으로 유명하다. 공격수를 무차별적으로 투입해 남은 경기시간을 결과를 위해 밀어붙인다거나, 극단적인 수비를 통해 승리를 지켜내려는 의지가 없다. 런던 연고의 첼시 FC가 그 반대로 극단적 승리 위주의 전술로 최근 10년 성공가도를 달리는 모습을 뻔히 보고서도 변화가 없다는 점은 심각하다. 그 증거로 무리뉴는 상대전적에서 아르센 벵거의 아스날을 인형 가지고 놀 듯 유린했다.(역시 실패 전문가답다.) 늘 균형과 침착함을 요구하는 패스 위주의 전술로 아름답게 축구하는 벵거스러운 축구는 최근 경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경질설이 이 좁은 한국에서까지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도 여유만만이다.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앞에 두고 선수들은 거친 트토넘의 압박에 공 돌리기 바빴다. 경기가 끝난 후 아르센 벵거는 늘 그렇듯 무표정으로 전술을 보완하겠다며 틀에 박힌 인터뷰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날은 현재 2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벵거는 본인이 해고되지 않을 것임을 누구 도보다 잘 알고 있다. 매년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아르센 벵거 감독은 일본에서 감독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일본스러운 이미지가 있다. 섬세하며 부드럽고,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전술 위주의 탐미적인 자세가 그렇다. 어쩐지 내겐 벵거의 아스날은 일본문학이 가진 특유의 낙관과 낭만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가 묘하게 닮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소설 우리가 좋아했던 것

일요일, 미야모토 테루의 장편소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을 읽다.

어제 교보문고를 갔다가 결국 <환상의 빛>을 구매하지 못했다. 다행히 근처 중고 서점에 한 권 남아있어 구입했다. 환상의 빛은 ‘미야모토 테루’의 대표작으로 국내에 이동진과 김혜리 기자의 추천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 역시 그들의 추천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어서 이 작품을 꼭 읽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까지 절판 상태에다가 중고책 가격이 4배까지 치솟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연말에 출판사가 다시 재출간하면서 이렇게 중고도서로나마 이 책을 품에 앉을 수 있었다. 중고서점에서 환상의 빛을 고르고 같이 눈에 띈 게 미야모토 테루의 장편소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환상의 빛>(소설 환상의 빛을 원작으로 했다.)을 보기 전이라 <우리가 좋아했던 것>을 먼저 읽기로 한다.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교보문고에 최근 설치된 넓은 좌석들이 눈에 띄었다. 물론 테이블은 없지만, 지하철 백팩족에겐 위해 의자에 앉아 무릎에 얹고 책을 읽기 좋을 정도의 푹신한 의자다. 정부가 도서정가제라는 기발한 정책으로 인터넷서점과 방문 서점의 가격차를 없애주면서 광화문 교보문고가 그에 화답하듯 다시 늘어난 방문 독자들을 위한 선물로 독서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라 추측해본다. 문학청년 콘셉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점심 즈음부터 <우리가 좋아했던 것>을 읽기 시작했다. 예전엔 거지처럼 주저앉아 책을 읽는 이들 때문에 책 고르기도 힘겨웠지만, 이제 꽤나 정돈된 모습으로 책장 간 간격까지 조정해서 그럴듯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연말에 맞게 문고는 북적거렸고, 다들 문학에 심취해 보여 들뜬 기운을 뿜어냈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말 그대도 술술 읽히는 소설이다. 망설임도 없이 동거를 선택하는 젊은이들과 고민 없는 섹스, 근사한 꿈을 향한 선택, 둔감한 경제 감각과 현실감을 깎아내는 낙관적인 꿈의 향연. 결과적으로 어둡고 침침한 <환상의 빛> 반대편에 서 있는 작품이다. 모든 것이 젊음이라는 대상화를 위한 변명처럼 들렸다. 이 작품에선 친구들 넷이 서로의 돈을 모아 불우한 친구를 대학에 보내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사고 친 10대 청소년에 집을 마련해 주는 등 믿지 못할 선행을 베푼다. 내 여자 친구가 딴 남자랑 자도 오케이, 여자 친구가 낙태를 하고 집에 들어와도 며칠 지나면 다시 오케이. 돈 없어도 네팔에 가서 희귀한 나비를 촬영하겠다고 몇 달을 정처 없이 떠돈다. 채무가 잔뜩 있어도 꿈을 위해 과감하게 회사를 퇴직하는 자세. 이것이 소설의 제목인 '좋아했던'이라는 형용사로 포괄되는 무한 긍정의 세계다.


우리는 마음에 너무 민감하면 사회적인 방해꾼으로 취급받는 시대에 살고 있어. 마음의 느낌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이 사회의 둔감증을 견딜 수 없어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고 말아. 그러지 않고서는 자신을 지킬 수 없거든.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30대 회사원의 철없는 생각인데, 나로선 이것이 일본 남성의 보편적 생각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지극히 감성적인 푸념으로 느껴졌다. 사회의 둔감함을 신경 쓰지 말고, 마음의 느낌에 신경을 쓰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자세. 마음이 상대에게 주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고, 그로 인해 받은 상처 또한 생각을 통해 정리해 털어내는 그런 방식이다.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수필을 읽고 나서 창 앞에 섰을 때의 생각처럼 맑고 투명하다. 내가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낡고 지쳐있다. 너덜너덜하다 못해 어느 순간 울화가 치밀 정도로 어둡고 침침하다. 내가 영화와 소설에서 진짜라고 믿는 것들은 대부분 염세주의로 가득 찬 삶의 축축함이다. 그러니 미야모토 테루가 구축한 이 행복의 유니온에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저 이 청년들이 내키는 대로 선택하는 것을 삐딱한 시선으로 읽어내리면서 저러다 어느 순간 문득 뒤돌아보고 후회할 거라며 혀를 찼다. 이런 동화 속 세상에서 살다 텅 빈 방 홀로 정적을 감당할 수 있겠어. 김기덕과 홍상수의 세계로 가고 말 거다. 어느 순간 인간이라는 게 후안무치한 족속들이라는 걸 깨닫겠지. 난 저주의 예측을 중얼거리며 책장을 덮어버렸다.

소설가 미야모토 테루

나의 이런 비판적 기조를 무시하듯 네 명의 젊은이들(나와 나이 때가 같다)은 얼굴에 언뜻 스쳐가는 표정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서로를 배려하며 떠나보낸다. 이별마저도 추억으로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도록 사려 깊기 여지없다. 난 직장상사에게 신나게 깨지고 넋을 잃고 걸어가는 퇴근길의 가장처럼 그들을 망연히 읽어 내려갔다. 낙관의 세상에 대해 의심하나 품지 않고 용서해버리는 미소. 그게 미야모토 테루라는 사람이구나 섣불리 추측해본다.

미야모토 테루는 194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온테몬학원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산케이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다가 1975년 신경불안증으로 퇴사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더 재밌다. 그는 퇴근길에 비가 와 낡은 책방에 들러 시간을 때운다. 요즘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소설들을 읽다가 문득 '이 정도면 내가 더 잘 쓸 수 있겠는걸' 생각을 한다. 그리고 소설가가 되었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미야모토 테루를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려준 작품이다.

내가 정의하는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관은 전체를 포괄하진 못해도 부분으로서 완전해지는 소설의 세계다. 이야기란 건 이 곳 저곳 들풀처럼 자라서 존재할 때 언제라도 찾아 벨 수 있기에 그 수와 양이 많을수록 세상은 풍족해진다. 이야기 안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는 믿음에 난 겸손해지고, 단언할 수 없는 쭈뼛한 말투로 진실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못한다.

이 글에서 아르센 벵거에서 미야모토 테루의 이야기로 옮겨 온 까닭은 딱 한 가지다. 어쩐지 아르센 벵거의 축구는 미야모토 테루와 공유하는 삶의 기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틀 후면 미야모토 테루의 대표작 <환상의 빛>을 읽을 것이고, 주중엔 아르센 벵거가 챔피언스 리그 예선에 참여할 것이다. 그것이 내겐 중요한 시간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금수> 관련 글 - https://brunch.co.kr/@mjmovie/16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환상의 빛> 관련 글 - https://brunch.co.kr/@mjmovi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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