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Sep 14. 2020

헬스와 축구는 상극이다

운동 <축구>

 나는 달리기를 꽤 잘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단거리에 유독 두각을 보였다. 허벅지와 몸 전체 근력이 타고난 바가 있어서 단거리는 늘 앞선에서 다퉜다. 체육 시간에 백 미터 달리기 기록을 측정할 때 신이 났다. 특히 체육대회 땐 늘 계주 주자로 나섰기에 어깨를 으쓱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내가 주목을 받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별 연습 없이도 잘 달린다는 게, 나만 산 중턱에서 굽어보는 기분이 들었다. 산에 오르느라 분주한 애들을 비웃듯 난 나가자마자 몸도 안 풀고 가뿐하게 정상을 찍었다.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니까 덤덤할 줄 알면 오산이다. 공돈만큼 기분 좋은 게 또 어디 있을까 싶게 턱을 치켜들었다. 세상의 모든 금수저도 다 그렇겠지.


 따지고 보면 잘난 게 없는 애들이 타고난 바를 의식한다. 난 학교에서 하등 돋보일만한 게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뭐 하나라도 잘하는 거 같으면 거기에만 매달렸다. 비슷한 예로 난 팔씨름에 소질이 있었다. 팔이 두껍고 짧아 반 친구들을 쉽게 이겼다. 근력이 잘 붙는 체질은 웨이트 트레이닝할 때 도움을 받는다. 피티 한 번 없이도 쉽게 무게를 늘리곤 한다. 글쓰기는 별별 용을 다 써봐도 제자린데 근력운동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금세 몸이 변한다. 그러니 딱 붙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 뻐긴다. 작은 키와 큰 머리의 보완제로 타고난 바를 자랑한다. 하지만 타고나지 않아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면 어쩔 텐가.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게 너무 좋으면 그땐 무력감과 슬픔이 찾아온다. 어쩔 수 없이 절실하고 절박해진다. 학교 다닐 때 내가 어려움을 느꼈던 건 축구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학창 시절 겪어야 하는 모든 집단생활에서 겉도는 느낌이었다. 축구는 그저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다.


 학교 다닐 때 축구를 멀리하면 잃는 게 많아진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축구를 했는데, 그때 딱 알았다. 내가 공을 무서워하는구나. 이후로 내가 발을 정교하게 움직이는 모든 활동에 젬병이라는 걸 알아챘다. 점심시간, 방과 후, 체육 시간까지 애들은 틈만 나면 축구를 하자고 하는데 난 그걸 피해 다니느라 바빴다. 주말이면 공원에 가서 형이랑 연습을 좀 해보려고 해도(형은 뭐든 잘하는 사람이었다), 형이 '이 병신아 좀 잘 좀 차 봐' 하면 기가 팍 죽어서 멀쩡히 날아오는 공에도 발을 헛디뎠다. 그래서 일찍이 축구를 포기해버렸다. 빠른 단념에 미련도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안 하기 위해선 감수해야 할 건 묵묵히 다 견뎠다. 가령 선생님이 억지로 축구 시합에 참가하라고 하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고역인 것은 조를 짤 때였다. 우선 내가 골격이 있고 달리기도 잘하니 애들이 나를 뽑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두렵고 무서워서 숨기 바쁘다. 내가 원하는 건 벤치에서 여자애들이랑 노가리를 까는 거지, 눈에 불을 켜고 공을 향해 달려드는 사냥개들이랑 뛰는 게 아니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최전방에서 공을 차다가 어느새 공만 피해 달리고 있다. 가장 괴로운 건 나를 지켜보는 여자아이들의 시선이었다. 특히 나랑 사귀던 경선이가 날 달리 볼까 봐 두려웠다. 관중석에선 남자애가 멋진 플레이를 할 때마다 약간의 술렁거림과 환호가 터져 나오는 통에 난 더 실수를 의식해버렸다. 내게 패스를 화면 되레 화를 내고, 공이 오면 멀리 차 버리기 일쑤였다. 처음에 공격수로 시작했다가 사태를 파악한 애들이 날 후방 수비수까지 내렸다. 하지만 공을 무서워하는 수비수는 용납될 수 없기에 끝내 골키퍼 자리로 좌천된다. 근데 또 키퍼는 키 크고 팔 긴 애들이 잘하는 자리라 난 덩치 크고 뚱뚱한 애들에게 밀려서 교체되어 버렸다. 그거 아는가 운동장 저 끝에서 벤치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기분을. 희희낙락한 표정을 한 뚱뚱보의 비웃음과 나를 보며 킥킥거리는 관중석 멍청이들의 코웃음을. 그건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길이다. 그 나이엔 고개를 들 수 없는 치욕이었다.


 작년에 본 영화 <톰보이>에는 동네 애들이 축구 시합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나는 그 부분이 나올 때마다 보기가 버거웠다. 학창시절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남자인 척하는 주인공이 실은 여자라는 게 곧 밝혀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가족과 새로운 동네로 이사 와서 막 적응하기 시작한 10살 여자아이 로레에게 그건 벅찬 일일 것이다. 로레 자신은 분명 남자로 사는 게 어울리는 것 같은데, 여자처럼 굴기를 강요하는 부모의 가르침이 영 못마땅하다. 짧은 머리를 한 ‘톰보이’ 로레는 이사 온 동네 친구들에게 자신을 미카엘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속이고, 수영복 안에 불룩한 뭔가를 넣고 남자 행세를 한다. 힘도 또래 남자애들에게 뒤지지 않으니 가뿐하게 연기를 소화한다. 축구 시합만 하면 골을 넣고, 시비를 거는 남자 놈을 때려눕힌다.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리더 격이 된 미카엘은 이제 더 수습하기 힘든 거짓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내가 이런 성장 영화를 힘겨워하는 건 비밀이 폭로되고 그걸 견뎌야 하는 혼자인 순간이 싫기 때문이다. 내가 생겨먹은 모습 때문에 왜 놀림을 받아야 하는가. 그건 타고난 건데 왜 내가 거기에 굴복해야 하는가. 아마 영화관이 아니었다면 난 계속 영화를 끊어서 보지 않았을까. 내밀한 비밀이 가족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나고, 나만 아는 고통을 굳이 설명해야만 한다. 그런 폭력적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지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미카엘을 소외시키는 동네 풍경을 같이 걸으면서 어깨를 토닥였다.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힘내 자식아.


 친구들의 비난과 따돌림. 폭력적으로 구는 학교 선생과 부모.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의 옥죄임. 번지르르하게 차려진 체계 같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을 한없이 냉대하는 학교라는 공간. 난 거기서 벗어났다는 걸 안도한다. 나 혼자 살면서 타인의 시선에 적어도 속으로 콧방귀 뀌며 사는 현재에 감사하다. 미카엘은 커서 어떤 어른이 됐을까. 어떤 직업을 택하고, 어떤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고 있을까. 엔딩 크레디트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속으로 상상한다. 학교에서는 도통 가르쳐준 적이 없는 소외감을 맛보며 혼자가 될 때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부정하는 말을 피해 달아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뭉클해졌다. 난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퇴근 후에 혼자가 될 수 있는 어른의 특권은 독립성이라고 믿는 편이다. 고독한 시간에 나를 위한 근력운동을 하고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적는다. 당당한 혼자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톰보이가 자신을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여건일 것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적에 도피처는 학교 도서관이었다. 당시엔 독서 열풍이 불던 때라 도서관을 가면 우선 선생님들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다. MBC에서 했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같은 프로그램 탓이 컸다. 도서관 문을 열면 거기엔 늘 사서 선생님이 있었고 그녀는 늘 친절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에 빛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늘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녹차 같은 걸 타 마시며 책장을 넘기며 미소 짓던 그녀. 지금에 와서는 그게 꿀 보직에 팔자 편한 직업을 쟁취한 젊은이의 안도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내게 그녀는 문학을 위해 태어난 천사였다. 책을 넘기는 쓱싹 거리는 소리와 오래된 책이 지닌 퀴퀴한 냄새. 마음이 안정되고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집에선 비디오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돌려보며 그녀를 향한 환상을 키웠다. 당시 운 좋게 여자 친구도 있었는데, 사실 맨날 노래방에서 몰래 소주 마시고 나자빠지는 그녀보다 사서 선생님을 더 사랑했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에 코를 박고 졸다가 조금 읽기를 반복하다가 선생님의 퇴근 시간에 맞춰 빠져나갔다. 그곳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내가 졸고 있으면 선생님이 커피 믹스도 타 주고, 잠 깨라고 자일리톨 껌도 주고 그랬다. 그리고 난 도서관을 주말에도 연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아버렸다. 당시 학원을 안 다니는 애들을 위해 평일 야간과 주말 오후 두 시까지 도서관을 열었는데, 내겐 더할 나위 없는 도피처였다. 나는 텅 빈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학교에서 컵라면도 먹고 도서관에서 숙제도 할 수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말마다 젊고 예뻤던 사서 선생님이 휴일마저 출근한다는 사실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휴일 출근이 날벼락이었겠지만, 계약직 파리 목숨이었기에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난 사람이 가장 없을 것 같은 이른 아침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엄마는 내가 공부하는 줄 알고 과일과 음료를 싸줬는데, 난 고스란히 그걸 사서 선생님께 갖다 바쳤다. 같이 김밥을 씹어먹으면서 문학을 논하던 그때가 정말 그립다. 그리고 가끔 선생님이 퇴근하면서 밥을 사주시기도 했다. 동네 고봉민 김밥의 라볶이는 정말 맛있었다. 그녀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올 때면 온몸이 달아올랐고, 이게 성인과 데이트하는 기분이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그땐 도저히 그 짧은 치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이 돌아가는 걸 막으려고 계속 천장만 볼 때도 많았다. 정말 꿈같은 나날이었다. 그 몇 달은 내가 책과 가까워지고, 혼자 놀 수 있는 평생의 취향을 발견하게 해 준 귀중한 시기였다. 지금도 책 얘기를 하러 이 모임 저 모임 기웃거리는 걸 보면 난 책 얘기를 할 팔자를 타고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평일에 축구 경기를 하자고 들러붙는 애들이 끓이지 않았지만, 난 단호하게 가운뎃손가락을 펴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날 놀렸던 축구화 신은 금수저들을 비웃으며 대문호들이 즐비한 곳에 자리 잡고 교양을 씹어먹었다. 그리고 도서관이 좋았던 이유는 여자애들과 얘기하는 재미였다. 여자 눈만 보면 겁부터 집어먹는 내 공포증을 사라지게 한 곳도 도서관이었다. 먼저 무턱대고 말을 거는 염치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우선 옆자리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그 책 나도 봤는데 좋더라' 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 물론 나도 안 읽은 책이지만, 철저한 사전 조사로 그녀에게 안 읽어도 아는 척 어필한다. 내겐 오랑우탄처럼 보이던 남자애들보다는 공감대가 높고 다정한 말을 보탤 줄 아는 여자들의 세계가 더 어울렸다. 그러고 보면 여자라고는 한 톨 배기도 찾을 수 없고 매주 축구를 하는 조직에서 십 년 넘게 일하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


 도서관에 가서 여자애들 틈에서 눈에도 잘 안 들어오는 세계문학 전집을 읽곤 했다. 단지 사서 선생님이 추천해줬다는 이유로 골라 들어서 열심히 코를 박고 졸았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서 선생님도 그 책들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청소년 권장 도서라고 권했을 뿐, 정작 본인이 들춰보는 책은 그 당시 유행하던 쎄씨 같은 잡지였으니까. 그래도 난 열심히 도스토옙스키, 디킨스, 카뮈의 작품을 읽었다. 아니 읽었다고 하기보다는 읽는 척에 힘썼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 온갖 내가 쓸 수 있는 어려운 어휘를 가져가다 쓴 게 수상 비결이었다. 내가 결정적으로 혼자 노는 걸 좋아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내 몰취향은 선생님들에게 많이 지적을 받았다. 호되게 혼난 적도 많다. 성적은 떨어지는데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늘 도서관에 처박혀서 집에도 안 가는 놈이 고까워 보일 리가 없지. 그러니 내가 영화 <톰보이>를 보고 심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뭔가 다른, 뭔가 특이한 놈을 고깝게 보는 아이들의 폭력적인 시선과 그걸 이해해주지 않는 어른들의 무심한 태도를 보며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미카엘이 숲 속을 걷는 장면을 유독 좋아한다. 녹음이 우거진 그곳에 서면 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냥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고, 집은 쳐다보기도 싫어지는 시간이다. 난 그 순간을 기억하며 영화 <톰보이>와 작별했다. 이 정도면 근사하게 헤어진 거다 우리.


 직장에서는 요즘도 축구 대회를 연다. 난 가끔 참가해서 내가 축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확인할 뿐이다. 공을 차면서도 나는 오늘 헬스장에서 오늘 어느 부위를 자극할지 생각한다. 미카엘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시시한 공놀이가 끝나면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고 아무도 없는 헬스장으로 들어간다. 축구는 부상을 당하기도 쉽고, 딱히 운동이 되는 것도 없어서 별 매력이 없다. 흥민이가 매주 골을 넣는 영국 프리미어리그라면 모를까 난 굳이 내키지 않는 축구를 할 마음이 없다. 그게 어른의 특권이라고 믿고 산다.

이전 16화 운동할 땐 비트가 있어야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