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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30. 2020

피할 수 없는 근육통의 습격

소재 <근육통>

 토요일 아침 시계를 보니 벌써 느지막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쓰려고 했는데 극심한 근육통에 도통 일어나기가 버거웠다. 어제 어깨 운동을 무리했더니 등부터 목까지 단단히 뭉쳐있었다. 몸을 뒤척이며 계속 잠을 청하다 보니 연달아 꿈을 꿨다. 꿈속에서 여러 지인과 소파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눴다. 장소는 너른 풀밭이었고, 나는 온갖 제스처를 동원해서 내 심정을 전달해야만 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힐링캠프 녹화장에서 다섯 시간은 족히 촬영한 기분이었다. 여덟 시간을 내리 자고도 지치는 걸 보니 꽤 심각했던 것 같다. 도무지 가닿지 못하는 관계, 거치적거리는 잡념, 휘둘리는 육체 같은 게 자꾸 출몰했다. 요추 부근이 뻐근한 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워 발가락을 꼬며 내 방 곳곳을 둘러봤다. 이불은 빤 지가 얼마 된 것 같지도 않은데 얼룩덜룩하다. 어제 입고 빨래통에 넣지 않은 츄리닝이 소파 뒤편으로 변사체처럼 유기되어 있다. 저 소파 뒤는 걸레로 닦은 지가 반세기는 넘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제 무게 욕심을 너무 부린 것 같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한동안 멍하니 벽지만 쳐다보며 시간을 축냈다. 오스카 와일드도 파리의 꾀죄죄한 호텔에서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겼다지. “나는 벽지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고 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겠다.”


 최근 저지른 짓이 떠올랐다. 길어지는 말, 도저히 서술할 수 없는 감정이 온방을 부유했다. 진솔하게 얘기한다는 게 변명조가 되고, 내 바닥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글에는 잘 숨길 수 있는데, 말은 적나라해서 인제야 확성기처럼 내 귀에 울린다. 나는 내가 상대에 몰입하고 지나치게 의지해버린다는 사실을 힘겹게 깨닫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실수를 반복했다. 내심 혼자서 잘 산다고 떵떵거렸지만, 우선 자세를 고쳐 앉으면 주책맞게 이것저것 다 꺼내놓고 있다. 그렇게 날 드러내고 나면 방에 혼자일 때 스멀스멀 부끄러움이 올라온다. 내 약한 환부를 꺼내놓고, 기어코 상대의 아픈 구석을 끄집어내야 뭔가 이뤄진다고 믿어버리는 지나치게 순진한 내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이럴 땐 발작 같은 단말마의 비명이 절로 튀어나온다. 방구석에서 이러고 있는 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


 뜬눈으로 벽지를 뚫어지라 바라보면서 이토 준지 만화에나 나올법한 기괴한 형상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근심은 점차 사라지고 한낮의 관능에 빠져들었다. 한때 테트리스에 매진하던 시절 벽돌공처럼 천장을 스크린 삼아 열심히 쌓아 올리고 부수길 반복했다. 긴 작대기가 나올 때까지 빈틈없이 쌓아 올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연애에 흠뻑 취했을 땐 그와 겨루는 몸짓을 재연하곤 했다. 대체로 그렇고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요즘엔 도통 글이 잘 안 나오다 보니 형체 없는 뭔가에 탐닉한다. 최승자의 시를 읽을 때처럼 일상 언어와는 다른 시적 언어가 나를 파고드는 시간이다. "일찌기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뇌 세포가 방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나와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이 시대의 사랑 중) 그녀의 시어는 도통 잘 읽히지 않아 하나하나 뜯어보게 만드는 신통함이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나오는 과잉된 발라드처럼 우악스럽다. 어쩌면 그 낯섦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느끼려고 최승자의 시를 읽는지도 모르겠다. 시어를 읽다 보면 생전 써보지 못한 감각이 발동한다. 브레히트가 말했던 '낯설게 하기'의 소격 효과가 이런 게 아닐까. 늘 보던 벽지가 생경하고, 늘 떠올리던 고민이 오늘따라 점점 더 기괴한 결론으로 치닫는 경이로운 시간. 그래서 벽지는 한결같은 페티시의 대상이다. 벽지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창작의 동력으로 삼고, 감정적으로 고양한다. 난 벽지를 상대로 무엇이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 굳이 망사스타킹이 아니어도 괜찮다.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뒤척였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카페로 갈 것이다. 뭔가 대단한 걸 쓰고 싶은 욕심은 없는데, 뭐라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대체 왜 밥벌이에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고민에 휩싸여 사는지 나조차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마치 어릴 적 마셨던 코카콜라처럼 목구멍이 따끔한 정도의 통증이다. 확실시 쓰고 따가운데 통각이 주는 일시적인 깨우침이 있다. 몸을 뒤집어서 다른 쪽 벽을 보고 생각을 이어갔다. 한낮의 백일몽은 점차 야릇한 상상으로 번지고,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뭉근한 감각에 휩싸였다. 지나간 매혹에 매여 현실을 잊고자 하는 꼴이 우스웠지만, 한때는 온 마음을 줬던 기억이라 두 시간은 너끈히 공상에 빠질 수 있었다. 방문을 잠그고 곡기까지 끊어내며 생각하느라 바쁘다고 외쳐댔던 더벅머리 중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저녁 먹을 무렵이 돼서야 겨우 방에서 기어 나왔다. 극심한 사춘기도 허기를 이겨낼 순 없었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한때 가장 뜨거웠던 시기를 미적 기준으로 삼는다던데, 내가 딱 그 꼴이다.


 중학생 때 유달리 좋아했던 만화가 <기생수>다. 어느 날 지구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기생 생물. 이 생물은 인간의 뇌에 침입해 머리에 기생하고 육체를 차지해버린다. 그렇게 인간을 포식하며 개체를 늘려나간다. 그리하여 점차 세를 확대하여 인간 사회를 잠식한다는 내용이다. 난 이 만화를 종교에 가깝게 숭배했는데, 그건 이 장대한 만화를 열어젖히는 계시와 같은 첫 문장 때문이었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간이 100분의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꽤 그럴듯한 로그라인 아닌가. 당시에 내 몸에는 죽음에 대한 병적인 탐닉과 지독한 콤플렉스가 무작위로 갈마들었다. 나 자신을 백반집 손걸레 정도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었다. 대충 몇 번 닦아내도 음식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더러운 테이블이었다. 세상이 미워서 정체 모를 뭔가가 나타나서 온 인류를 절멸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사시사철 고작 젖과 좆과 질 문제로 골몰하는 나를 누군가 응징해주기를 바랐다. 그때 나를 엇나가지 않도록 붙들어 준 게 어쩌면 이런 공상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공상과학에 탐닉했다면 과학자가 될 수도 있었겠으나, 공상만 하다 보니 그냥 지금의 내가 되었다. 방구석에서 온갖 음습한 생각으로 벽지를 더럽히는 한량에 머물렀다. 난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옆에 널브러진 책을 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라는 아포리즘이 가득한 산문이다. 유머러스하고 냉소적인 구석이 있어 좋아한다. 잡다한 지식이 많은 데다가 종국엔 찡해지게 만드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도 결국 다 죽는다는 게 내게 남세스러운 위안을 안겨줬다. 저자 데이비드 실즈는 어린 시절 농구팀에서 빼어난 실력을 뽐냈고, LA 다저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육체에 유달리 관심이 많아 학자로서도 노화와 인간을 탐구했다. 뿐만 아니라 걸출한 소설과 에세이스트로서 일가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엄연히 죽어가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쏟아지는 요통에 잘 걷지도 못한다. 누가 그랬던가, 글을 쓸 때는 반드시 벌거숭이여야만 한다고. 그는 자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온 도서관을 뒤져 증명해냈다. 그는 샅샅이 연구하고 살피지만 끝내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에 어떠한 해답도 찾아내지 못했다.


 자다가 무슨 꿈을 꿨는지 몸에서 땀 냄새가 심하게 났다. 나는 어렵사리 소파에 기대앉아 텅 빈 거실을 바라봤다. 샤워하고 옷을 입고 또 매일 타던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게 버겁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은 공연을 보는 날이니까 서둘러야지. 윤고은 작가의 단편소설 <1인용 식탁>을 연극화한 작품을 종로에 위치한 한 극장에서 보기로 했다. 대충 샤워를 하고 머리에 뭐를 좀 바르고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 어깻죽지가 계속 아파오는 게 오늘은 헬스를 하기 어려울 것 같다. 


 공연에 들어가기 전 스타벅스에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머금고 있던 생각을 털어내려고 솔직함과 위악을 반쯤 섞어 썼다. 그 와중에 배가 고파져서 과일과 바나나를 시켜 먹고 요구르트에 샌드위치까지 먹어버렸다. 날이 좋아 보여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근육통을 삭혔다. 창가 너머 인파를 구경하며 계속 어깨를 문질렀다. 창밖으로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시시덕거리는 사람들이 즐거워 보였다. 뭐하러 그렇게 아름다운지, 곧 없어질 텐데. 오후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바삐 움직이는 손만이 홀로 남아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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