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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2. 2020

코로나 시대의 헬스정신

소재 <코로나>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느니 군살도 는다. 헬스장은 문 닫은 지 오래고 산책마저 드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뱃살이 한바탕이다. 견디다 못해 홈트를 해보겠다고 몇몇 운동기구를 집에 들여놨다. 헬스장에서 쓰는 20킬로짜리 중량봉을 사고, 바벨과 덤벨은 동네 운동용품점에서 중고로 데려왔다. 무리해서라도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무리해서인지 내상이 깊다. 다음 달 카드값이 통장에서 나가면 온 거실에 출혈이 흥건하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근손실이 아니라 과체중으로 실려 갈 판이다.


 한동안 못했던 데드리프트를 위시하여 온몸을 자극했다. 등허리가 뻐근해질 때까지 봉을 들었다 놨다. 숨이 가빠지면서 몸에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 이 단단한 쇳덩이를 거금 주고 사들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어떠한 심오한 철학보다 더 큰 지혜가 육체에 담겨 있다"는 니체의 문장에 밑줄을 쳤다. 요즘 내가 일상에서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몸을 움직이는 일뿐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깻죽지가 쑤셔올 때 비로소 스스럼없이 웃는다. 종일 컴퓨터로 일을 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기쁨이다.


 난 일상에서 육체의 감각을 중시한다. 내가 만지고 견디고 부대끼는 과정에서 실체를 감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종일 무거운 가죽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도 굳이 이북 대신 양장본 책을 사는 이유도 비슷하다. 운동해서 몸이 욱신거릴 때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가령 테이프와 시디로 구매했던 음악과 달리 멜론 스트리밍은 애착이 떨어진다. 음악이 더 구려진 것도 아닐 텐데 왜 도통 마음이 가지 않을까. 어쩌면 음반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없으니 실감이 덜한 걸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신보를 구매하러 레코드점으로 뛰어갔고, 어떤 앨범을 사야 할지 몰라서 이 음반 저 음반 빼서 만져보는 걸 즐겼다. 사장님에게 한 소리를 듣더라도 촉감과 냄새가 지닌 느낌을 중요했다. 얼른 혼자 듣고 싶어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귀가했고, 시디플레이어에 신보를 넣고 빳빳한 속지를 만지다 잠이 들었다. 이런 총체적 경험이 없는 음악은 내게 온전한 것이 아니다. 이제 음악은 5초 정도만 들어보고 맘에 안 들면 쉬이 넘길 수 있는 소모품이다. 소유할 수 없으니 잠시 즐기다 모른 척한다. 별 노력 없이 사귄 연인과는 쉽게 헤어진다는 속설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비슷한 이유로 요즘엔 쇼핑도 재미가 덜하다. 손가락 한 번 놀리면 결재가 되니 편하긴 하다만, 종결 부호 없이 끝나는 문장처럼 찜찜하다. 터치와 터치 사이에 돈이 빠져나가긴 했는데 결심 과정에서 부대낌이 없으니 내 것 같지 않다. 고전적인 소비 과정이 가진 미덕은 나가서 물건을 쟁취하는 데 있지만 요즘 쇼핑은 택배기사님만 기다리는 수동적인 행태에 불과하다. 백화점 주차요금 걱정도 없고, 발품 팔이도 딴 세상 얘기다. 대면 전 카톡 대화가 소개팅의 성패를 좌우할 수는 없듯이 만지지 않는 쇼핑은 좀체 섹시하지 않다.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미술관에 들러 백 년도 훌쩍 넘은 작품에 목을 매는 건 왜일까. 미술은 불멸을 향한 동경을 부추기는 얼마 남지 않은 예술이다. 영화나 음악처럼 무턱대고 복제할 수 없으니 오리지널리티를 지켜낼 수 있다. 물론 구글 검색창에 몇몇 단어만 치면 어떤 작품이든 띄워볼 수 있지만, 미술은 진품을 인정하는 드문 예술이다. 팝아트와 개념 미술이 복제와 대량생산을 부추겨도 여전히 모네의 <수련>을 보기 위해 무수한 이들이 교통이 불편한 미술관을 찾는다. 전시회 한쪽 벽을 떡 하니 차지한 유일무이한 그림은 인간 존재의 위안이다. 영겁의 세월을 거쳐 죽음 반대편에 선 그 위력이 죽은 자를 소환한다. 단 하나가 아니라면 모조리 모조가 되어버리는 불가침의 영역에 덧없음이 발붙일 자리란 없다.


 요즘 역병의 여파로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다. 해서 그냥 넷플릭스와 왓챠 플레이로 영화를 본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 날 때 수시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영화보다는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영화를 다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제는 잠들기 전에 봉준호 감독의 상업 영화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를 봤다. 딱 삼십 분만 보고 자려고 했는데, 너무 좋아서 끝까지 다 틀어놓고 말았다. '저런 장면이 있었던가. 저 배우가 이 영화에 나왔던가.' 세 번 이상 본 영화임에도 다시 보니 생경하다 못해 낯설기까지 하다. 내가 어릴 적 거닐던 아파트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이 영화엔 과거 내 모습 일부가 담겨있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장난을 치던 추억, 단지 공원에서 뒤로 걷는 아주머니들을 보는 기분, 건물 지하에 자리한 경비아저씨의 아지트를 구경했던 기억이 영화 장면들과 함께 빗발쳤다. 


 영화는 살아있는 뭔가와 같아서 내 기분에 따라 입장을 달리한다. 우린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인상을 받고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하고 나름대로 판단한다. 하지만 그 사람을 내일 만나게 되면 또 다른 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마주치면 또 다른 면을 보고 나름대로 판단한다. 필립 로스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난 확신에 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영화가 전혀 딴판으로 보일 때 생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건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쓴 글을 읽을 때도 생경한 느낌에 휩싸일 때가 많다. 어쩐지 내가 쓴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문장이 한가득하다. 현실의 나완 묘하게 다른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 당신 누구시오, 물어봐도 딴소리만 한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과 애써 보이고 싶지 않은 내가 포개져 있다. 마치 인스타그램 피드처럼 내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동떨어진 놈은 아니라 손사래 칠 수도 없다. 글을 쓰길 잘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평소 언어의 한계를 절감한다. 특히 글을 쓸 때 자주 허공을 응시하는데, 그건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가 버거워서다. 볼품없는 문장을 적고 나면 무력함에 휩싸인다. 하지만 끝내 뭐라도 쓰면 어느 틈엔가 다음 문장을 적고 있다.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지만 어쩐지 다음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남발하면서라도 어찌할 바를 써나간다. 고민에도 근력이 붙는 느낌이랄까. 늘 버겁게 쓰면서도 차곡차곡 쌓인 문장을 보면 어쩐지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든다. 김훈 작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연필로 글을 쓴다고 한다. 그는 검약한 작업실에서 지우개를 비벼가며 복붙의 유혹을 떨쳐낸다. 이 시대의 마지막 고전주의자처럼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연필심을 다듬는다. 서리한 팔뚝 아래 몸으로 쓱쓱 밀고 나가는 느낌이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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