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기술이라면 우린 뭘 배워야 할까

사랑에 늘 깨달음은 늦다

by 박민진

요즘 일도 열심히 하고 멈췄던 치장에도 힘쓴다. 귀찮음에 걸렀던 하체 운동도 꾸준히 한다. 허벅지는 모든 의지의 산물이니까. 며칠 전에 스쿼트를 하는데 오른쪽 허벅지와 골반 주위가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나름대로 꾸준히 단련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게를 올리니 이 모양이다. 쿵쾅거리는 음악을 귀에서 떼어내고 다시 현실로 복귀하려니 힘에 부친다. 운동은 잠시 내 처지를 잊게 하지만 샤워를 끝내고 책상에 앉으면 다시 근심이 골을 울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잃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다시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넘었고, 뭔가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다. 내가 그르친 게 벌써 몇 번인가. 왜 이런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거지. 그는 침묵의 방식으로 포기에 익숙해진 상태였고, 난 별다른 말을 보탤 수 없었다. 그는 마치 방학이 끝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일상으로 옮겨갔다.


"현대인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받는 일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무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한 말이다. 사랑의 이기적인 면모를 모르는 바 아니나, 막상 이렇게 문장으로 써보니 찔린다. 숱하게 휘두른 전횡이 있다.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는 흔들 수 있을 만큼 흔들어 봤다. 어 흔들리네, 그럼 더 잔혹하게 군다. 그것을 사랑으로 믿었을까.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한다.

사랑을 받는 일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남자는 사랑받기 위해 돈을 잘 벌고, 사회적 지위가 굳세야 하고, 여자는 사랑받기 위해 자기를 치장하고 꾸밀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이런 소리를 하면 큰일 나겠지만, 에리히 프롬은 집필 당시 경향에 대해 말한 것이리라.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연마해서 사랑받을만한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랑을 자격 문제로 가져온다. 요즘 풍속도가 자기 스펙을 올려 좋은 곳에 취직하고 널찍한 혼삿길을 위해 돈을 모으는 건데, 어째 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고 이러는 건가 싶다. 그런 세속적인 걸 멀리하려고 꽤 노력했는데 나 역시 대차게 휘둘리고 있다.


"사랑을 기술이라고 치면, 사실 누구와 맺어지던 관계가 없다. 정략결혼처럼 누군가와 점지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결심과 결정을 내라고 사랑의 기술의 법칙을 지켜가며 사랑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결혼제도의 사상 전제를 사랑하려는 능력과 의지의 문제로 다룬다. 난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랑을 늘 '빠진다'라고 말해온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다. 사랑은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거라 믿는데, 프롬의 말대로라면 빠진다는 건 허상에 불과하다. 우린 우연이 운명으로 변모하는 환희를 반길 뿐이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불가항력인 데가 있어서 그 말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성과 사고가 마비되고 오로지 사랑만 현현하길 갈망한다. 현대 사회가 기술 발달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여 의지대로 선택하는 게 특징이라지만, 오직 사랑만큼은 낭만 안에 가두고 싶은 심정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착각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개체 선택이 유전자의 조종하에 있다고 말했을 때도 난 인정하지 않았다. 사랑에서만큼은 속수무책인 무목적 하에 머물고 싶으니까. 내 사랑은 그런 로맨틱한 형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를 사랑하겠다는 열렬한 맹세의 말을 주문처럼 되뇌고 싶진 않다. 도무지 떨칠 수 없어서 책 한 줄 읽지 못하는 상태가 그립다.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더 아득한 그리움을 더 동경하다. 마치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오그라드는 문장을 한껏 적고 싶다.


앞서 말한 대로 에리히 프롬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건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며, 결정이고 판단이자 약속이라고 단언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책임과 의지가 있다면 대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문을 외고 그를 대가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미의 마음처럼 간과 쓸개까지 빼줄 듯 헌신을 쏟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다면 관계를 그르치지도 않을 거고, 그르쳐도 다 내 의지 부족 탓을 할 수 있다. 헤어진 연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큰 덕일 것이다. 여기서 우스운 점 하나. 사실 <사랑의 기술>은 사랑 전반에 관한 저자의 심리학 이론인데, 난 역시 책 제목처럼 이 책을 실용서로 읽어버린다. 심리학이라는 말은 내팽개치고 자기계발서처럼 사랑의 조건을 탐구한다. 여기엔 낭만은 없어도 이상한 위로가 있다. 청교도적인 수련이 사랑을 이루는 덕목이라니 우선 사랑을 신봉하여 모실 수 있다. 허튼 신인류의 사랑을 무시하고 고고한 사랑을 기릴 수 있다. 내 사랑의 실패도 고차원적인 갈등으로 여길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생전에 네 번 결혼을 했던데, 그는 자신이 세운 사랑의 이론을 실천했을까. 학자로서 사회심리학 이론을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었을까. 실용할 수 없다면 흥미를 갖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런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궁극의 사랑을 꿈꾸며 여성에게 다가가는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남자 프롬.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며,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 남자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그간 사랑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한 번도 이런 생각을 안 해봤는데, 프롬님이 원인을 가려내야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니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요즘 시대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난 어렸을 적 경험뿐만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사회구조와 문화에 영향을 받아왔다. 내가 거쳐온 문화 자본과 경험의 기저에는 그 당시 풍속이 깊게 자리한다. 나는 사랑마저도 통념에 따라 행해왔다. 나는 나를 상품 교환가치로 가늠하고 적절한 가치 교환을 위해 사람을 만났다. 이런 사실을 부정한 때도 있었지만, 관계가 안정되면 어느새 계산기를 두드리는 날 발견한다. 그간 모든 연인을 가치 교환 관계에서 다뤄왔음을 시인해야겠다. 내가 이 정도 줬으니 너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식으로 연인을 대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요즘 시대 연애가 다 그런 게 아니겠냐면서 별 의심 없이 교환했다. 거래성관계를 맺다 나가떨어지면 가책과 후회에 시달렸지만, 그런 고통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주위 사람들 말에 희석됐다. 너 말고도 다 그렇게 살아. 이 말은 참 힘 빠지는 말이면서 위로가 된다. 내가 누구와 다르지 않다는 시시한 말이면서, 누구나 다 이런 실수를 한다고 생각하니 안도한다. 그리고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거다. 사랑의 의미를 배운다는 게 가능하다면, 실패 원인을 가려내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면 나는 다시 행갈이를 하고 새로운 문장을 적어보고 싶다.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꼈나. 영원한 동반자라고 믿지 않음에도 관계를 지속했나. 근데도 그걸 사랑으로 믿지는 않았나. 사랑이 아니어도 영원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괜스레 상대를 보호하려 하고 상대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나를 보고 사랑이라고 했다. 상대에게 존경심을 느낄 때 사랑인가 착각하기도 했다. 나는 내 모습을 숨기고 아주 빠른 속도로 상대의 일상에 편입되어버렸다. 나는 어느 순간 그를 만지고 있었고, 걷잡을 수 없이 헛된 약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선뜻 희생하려고 할 때 사랑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내가 일부러 커피를 사줘 가면서까지 작업을 걸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가갔다. 느슨한 얼굴로 주색에 경도된 모습에 반해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따스한 몸에 마치 찜질방에 들어온 것처럼 안온하고 푸근하게 느꼈다. 욕정에 빛이 바랜 관계를 맺기도 했다. 대체 사랑은 내게 어떤 모습인가. 프롬의 고고한 이론 앞에서 난 다시 쳇바퀴 같은 의문에 휩싸인다. 내 사랑을 마치 우주에서 마이크로스코프로 바라보고 그 미미함에 실망하며 팔짱을 꼈던가. 사랑에 버림받은 개츠비처럼 울곤 있지만, 어느새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나. 광각 카메라로 누군가를 비추며 오해하고 다시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우주의 먼지만큼도 진지하지 못한 나. 이런 후회와 쓰라림은 반복을 언제까지 지속할까. 어른들의 거짓된 삶을 벗어나고자 이런 글도 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