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할 때 새겨들으면 좋을 이야기
<에로스의 종말>로 유명한 모로코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저서 <사랑 예찬>에서 사랑을 향한 무수한 의문을 일축하고 이런 말을 남긴다.
“왜 사람들은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자주 말할까. 이는 우연을 영원 속에 고정하는 것이다. 영원의 선언은 시간 안에서 실현되고 전개된다. 이런 ‘나는 너를 사랑해’가 섹스를 위한 술책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는 하나의 우연에서 지속, 끈기, 약속, 충실성을 끌어내겠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말은 의심스럽다. 달리 들으면 이 말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닌, 딴 뜻이 있어서 하는 말로 들린다. 사랑은 순수하지만, 말속에 속임수가 있다. 사랑을 볼모 삼아 행해지는 약속은 거짓이다. ‘카사노바’와 사랑을 나누고 헤어진 여자는 행복했다. 하지만 ‘돈 주앙’의 연인은 이별 후 그를 극도로 증오했다. 두 사람에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카사노바는 하룻밤 풋사랑이든 여러 여자를 만나든지 진정한 사랑을 맹세했다. (그는 주장한다, 그 순간은 진정 사랑했다고) 반면, 돈 주앙은 사랑보다는 오로지 여자를 취하는 데 급급했다. 숫자와 기호의 의미로 여자를 취급했다. 돈 주앙에겐 사탕발림이 없었고, 그 결과 수많은 여성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2019년 한국에 돈 주앙이 있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카사노바는 사랑의 주술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순간의 마법을 십분 활용했다. 카사노바는 사랑을 속삭이는 자기 자신에 취해버렸다. 두 인물의 사후평가가 갈렸다면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입으로 놀린, 말의 주문을 아는 자의 승리다. 사랑이 최고의 선이고, 유일한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의 허위는 게으른 진실 못지않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에 혹해 사랑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