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주눅 들지 않고 내 잣대를 고쳐나가는 마음
삶은 이런저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일,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다. 요즘 정신이 없다.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분주히 뭔가를 한다. 내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위한 것일 뿐 뭔가를 응시할 자리가 없다. 사실 하나씩 돌이키면 사이사이 난 잘 빈둥대고 있다. 가까스로 일어나서 출근하고도 커피는 손수 내리고, 일로 만난 사람들과도 짬을 내서 근화 토크를 한다. 수입과 지출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영화와 소설, 글쓰기, 운동이 제 지분을 차지한다. 손아귀에서 자꾸만 빠져나가는 삶의 의미를 놓칠세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밸런스 게임을 하는 셈이다.
종이 냅킨, 포스트잇, 또는 읽던 책 귀퉁이처럼 집 안 여기저기에서 바쁘다는 티를 메모로 남겨뒀다. 가끔 그것들을 어디 뒀는지 찾느라 허둥대며 거실과 방을 오락가락한다. 메모들을 잃어버리면 자칫 해야 할 일을 놓칠까 봐 초조해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써놓은 메모들을 아이클라우드와 몰스킨에 보관해뒀는데, 때론 내용이 모호하고 무슨 일과 관련된 것인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읽기도 한다. 새로 읽은 책에 관한 끄적임, 식당 예약, 그에게 전화하기, 원고 정리하기, 신간 책 사기, 훈제 연어 등 장 보기, 운동 루틴 등등 구분 없이 파편으로 떨궈져 있다. 삶은 미처 돌아볼 새가 없는데 새로 읽고 배워야 할 것들은 쌓여만 간다. 잠시 멈추고 정제해야 할 시간인데 투두 리스트는 줄지 않고 늘어만 가니까 별 수 없다. 마치 이 리스트를 다 채우는 게 삶의 목적이라도 된 것처럼 몰두한다. 늘 우선순위를 헷갈려해서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에 힘을 꽉 준다. '정신 차리고 틀림없이 살아야 해.‘
주말이면 어떤 의식처럼 서점에 가서 문학도라면 능히 읽을 만한 책을 고른다. 드높은 명성과 그만큼 난해하다는 악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딱딱한 표지를 만지며 감격한다. ‘너를 매일 밤 내 침으로 흠뻑 적시더라도 우리 끝장을 보자.’ 이 책들은 내 분주함의 일정 부분을 담당할 놈들이다. 책을 고를 때 이름값을 따지다 보니 늘 명사의 추천에 귀가 펄럭인다. '지식인의 서재'에 나온 필독서를 기웃거리고, 노벨문학상 부커상 퓰리처상 공쿠르상 같은 이력으로 책의 우열을 가려낸다. 알려지지 않은 책은 등한시하고, 대문호의 품에서 아양을 떨고 있다. 그렇게 책장에 꽂아두고 방치한 책이 한 트럭이다. 어머니는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줄 알고 의아해하신다. 독서량이 많으면 분명 지혜롭고 현명한 어른이 될 줄 아셨겠지만 난 여전히 그녀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어제 쓴 것도 오늘 행하지 못하는 신세니 내가 눈을 비비며 읽은 문장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정녕 알 길이 없다.
나처럼 허영심으로 책을 고르면 시대의 화두를 다룬 책에 무감해진다. 현실이 가리키는 바를 성실히 기술하는 요즘 작가와 멀어졌다. 이왕이면 어디 가서 뽐내기 좋은 책만 고르니, 막상 주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지 못했다. 고매한 지성의 가르침에 정신이 벙벙해서 시대의 고통을 살피는데 게을러졌다. 요즘 나오는 책을 보면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쓴다. 사전을 찾아보니 타인에 대한 반응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능력이라고 하던데, 그건 아마 예민하게 타인의 사정을 살피며 내 앞에 앉은 그가 어떤 심정일지 상상할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불편하고 귀찮더라도 그의 표정을 살필 수 없다면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감수성은 이제 미덕이 아닌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닐까. 나도 하도 귀가 간지러워서 최근 부쩍 이슈를 모은 사회학 서가를 기웃거렸다. 사회학자, 저널리즘에 입각한 인문서들을 뽑아 들고 대충 목차만 살펴봤다. 우리 사회가 근심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뭐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아니다. 귀를 열기 싫으니까 다 숙제처럼 느껴졌다. 이런 불안과 조바심은 또 다른 분주함의 토대로 이어진다. 뉴스 한토막을 들어도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질까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내 분주함을 쪼개서 감수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언제 어느 순간에 내 초라한 민낯이 드러날지 모르는 일이다.
며칠 전 한 모임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십 년 넘게 해온 친구에게 시어머니들이 가장 선호하는 며느리의 직업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오는 길에 폰으로 며느리가 가졌으면 하는 직업을 설문한 인터넷 기사를 읽고 온 터였다. 네가 최고라니까 얼마나 좋을까. 나였어도 좋을 것 같아서 스스럼없이 추켜세웠다. 내 딴엔 듣기 좋은 농담이라고 실실 웃으면서 과장했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던 친구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원하는 30대 여성으로 범주화했다. 더욱이 시어머니들의 평가 대상이자 누군가의 신붓감으로 대상화했다. 그가 어떤 삶을 바라며 사는지도 모르면서 빤히 안다는 듯 치부했다. 아무리 뭘 좀 안다고 써대도 이 모양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기분 나쁜 내색을 했음에도 '뭘 그리 발끈해'라는 말로 무안을 줬다는 거다. 사과는커녕 내 말이 별거 아니었다는 식으로 눙쳤다. 난 훌륭한 방어기제를 갖추느라 여념이 없었고, 다음 날이 돼서야 쓴 커피를 마시면서 기억을 곱씹을 때 뭔가 버석거린다고 느꼈다. 며칠 동안 불편한 마음이 날 따라다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고순(고현정)은 제 인생과 배우자에 대해 섣불리 넘겨짚는 경남(김태우)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그냥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 난 늘 더 나은 삶을 갈구하지만, 그래서 목 놓아 뭔가를 말하지만 언제나 잘 알지 못하는 처지다. 딱 아는 만큼만 말하지 못해 실수 연발이다.
시대가 지목하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 젠더, 페미니즘, 난민과 같이 소수자에 관한 논의는 이제 멈출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시류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어보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꿔야 하는" 책임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면 성찰의 계기로 삼고 고쳐내야 한다는 말이다. 내 나름대로 누군가의 감정을 살피고, 섬세한 태도를 지녔다고 믿어도 언제든 틀릴 수 있게 마련이다. 뭔가를 아는 건 쉽지만 틀린 걸 인정하고 고치는 건 어렵다. 내가 초라해질까 봐, 내 무디고 무심한 일상이 도마 위에 오를까 불안해서 실토하지 못한다. 그렇게 두터운 방어기제를 갖추면 대화에서 섬세할 수 없다. 섬세하지 못하면 많은 걸 놓치고 산다. 결국 모든 판가름은 디테일에 있다. 악마도 정교함에 있고, 상황을 가늠하는 예민함 없이 문학은 성립될 수 없다.
한국 문단의 거목 ‘이청준’ 작가는 전 생애를 걸쳐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을 교정했다. 쇄가 거듭하고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메스를 들이댔다. 모두가 인정하는 역작을 내놓고도 고칠 구석을 찾아냈다. 본체 글 자체가 추상적인 마음을 모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빗나가기 마련이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도리어 ‘언어 결정론’의 작동 원리로 여겨진다. 언어가 가진 결과 흠이 사람이 지닌 불완전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즉흥성이 괴물처럼 도사리는 소굴에 들어가길 꺼린다. 늘 말을 하기 전에 긴장이 도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예전에 술자리에 가면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멋져 보였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다르다. 점점 더 원칙주의자가 발붙여 살기 어려운 시대로 느껴진다. 일갈하는 자의 통찰엔 시원한 어깃장이 있지만, 주관과 원칙이라는 건 결국 하나의 잣대에 불과하다. 뭐든 잣대로 판가름하면 매사가 쉽지만 그만큼 오차는 커진다. 결국, 상황에 맞은 최대한 여러 잣대를 돌려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번거롭고 피곤하지만 그게 언어를 대하는 자의 숙명이 아닐까. 지식인이란 박학다식한 게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제목이 주는 옳고 그름을 따지겠다는 어감이 주듯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실격된' 자들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까? 지체장애를 가진 법률가 김영원은 시작부터 잘못된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를 겨냥한다. 그는 이 질문에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식의 공익광고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작가는 누군가를 실격시키는 자의 기준이라는 게 ‘일반의 폭력’을 내재한다고 말한다. 특히 아름다움이라는 주관의 영역마저 단호히 규정하고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면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태도에 관해 말한다. 이건 비단 장애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개인의 인식 문제를 마치 사회가 정한 표준규약이라도 되는 양 밀어붙이는 사회 공통의 문제라고 정의 내린다.
신체의 장애뿐 아니라 빈곤, 학력, 외모, 말솜씨에 지적 능력까지 세상의 매력 자원은 수도 없이 존재한다. 우린 미인대회에 참가한 사람처럼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쌓아 올린다. 인생의 스펙이 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것임을 알고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사회가 추하다고 말하는 걸 타고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앞서가는 사람은 품격을 강요하며 떼쓰지 말라고 엄포를 놓지만, 시끄럽게 굴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는 세상을 향해 ‘정치적 올바름’을 운운하며 따지고 드는 건 생떼에 불과할까. 어느 정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건 어쩌면 유토피아를 꿈꾸는 아이의 몽상과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내 우려를 일축하듯 작가는 말한다. 적어도 질문을 요구하고 말을 받아 다시 한번 더 골치 아픈 질문을 던져보고,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는 있어야 한다고. 때론 쉬운 답보다는 정확한 질문이 핵심에 가까울지 모른다며. 그것이야말로 그가 무릅쓰고 변론에 나선 이유일 것이다.
인터넷 전쟁이라는 말을 서태지가 가사에 쓴지도 이제 20년이 넘었다. 전쟁은 지금도 한창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전장은 역시 젠더와 세대의 영역이다. 먹고 살기가 팍팍해서인지 여성 혐오와 남성의 박탈감이 만연하다. 노인을 혐오하고 청년은 기득권에 피해 의식을 가진다. 한남, 김치녀가 국어사전에 올라가도 될 만큼 보편 용례로 자리 잡은 지금, 우린 어떻게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상대 눈을 마주하며 얘기할 수 있을까. LGBTI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기겁을 하면서, 어떻게 스스로 성 정체성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서툴러도 괜찮으니 편하게 얘기해야 마땅하다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부터 위엄을 찾으려고 애쓴다. 지금 눈앞에 닥친 건 출근길이고, 커피 한 잔을 두고 마주할 동료가 엄연한 지금이다.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바쁜 성미를 죽이고, 팔짱을 풀고 들어봐야 한다. 난 잘 알지 못하니까. 제대로 생각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