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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02. 2021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잖아

소재 <치팅데이>

 월요일 고된 회의를 마치고 퇴근했다. 계획한 대로 가슴 운동을 하고 기분 좋게 회사 근처 단골 초밥집으로 향했다. 연어와 광어는 단백질이 풍부한 생선이다. 물론 스시에는 쌀이 가득하지만, 탄수화물도 근력 성장에 필수 요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부담스럽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구내식당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유산소를 따로 못해서 20분 거리인 초밥집을 향해 힘차게 걷는데 역ᅠ입구 주변에ᅠ사람이ᅠ잔뜩ᅠ모여 있었다. 납작만두와ᅠ호떡을ᅠ종이컵에ᅠ받아서ᅠ먹는ᅠ이들이ᅠ어찌나 많은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이 불경기에 떠들썩한ᅠ게ᅠ오픈한지 얼마 안 된 집인ᅠ모양이었다. 사장님의ᅠ분주한ᅠ손짓에ᅠ사람들은ᅠ천ᅠ원짜리ᅠ한두ᅠ장을ᅠ내고ᅠ열심히ᅠ먹고ᅠ있었다. 정말ᅠ말 한 마디 없이 열띠게들ᅠ집어 먹었다. 묵묵히ᅠ고개를 숙이고 허기를ᅠ지워내는 게 느껴졌다. 오뎅 국물을 푼 떡볶이는 적당히 잘 버무려졌고 닭꼬치는 노릇노릇했다. 허기진ᅠ퇴근길. 나도 왠지ᅠ그냥ᅠ가기는ᅠ아쉬운ᅠ분위기였다.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느닷없이 오늘을 치팅데이로 정했다.     


 치팅데이(Cheating Day)는 '(몸을) 속인다'라는 뜻의 'Cheating'과 '날(日)'이라는 뜻의 'Day'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로, 식단 조절 중 부족했던 탄수화물을 보충하기 위해 한 주에 한 번 정도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는 날을 뜻한다. 고되게 운동하는 분들에게는 꼭 필요한 날이지만, 나 같이 식단을 어설프게 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맛있는 거 먹을 때 치팅치팅 하면서 핑계를 대기 좋은 날이다. 


 난 끼니 때만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살아오면서 단연코 탄수화물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삶은 밥심으로 믿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까 몸은 한 번도 속아 넘어간 적이 없다. 치팅했던 건 늘 내 의지력이었다. 내가 치팅할 때 레퍼토리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아니 내가 한 번 사는 인생 먹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치팅데이에는 몸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속일 줄 아는 합리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럴 때 한 번 사는 인생을 떠올리면 족하다. 왠지 금연할 때나 늘어놓는 변명 같지만 아무 데나 붙여놔도 다 통한다. 내가 한 번 사는데 오늘 놀지도 못해? 아니 오늘 휴가도 못써? 여름 휴가로 유럽도 한 번 못가? 이런 식이다. 조금 과한 지출이 필요할 때는 살고 죽는 문제를 들먹거리면 더 쉽다. 아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새 차도 한 대 못 뽑아? 죽기 전에 그래도 강남 아파트에는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어떤가 그럴싸하지 않은가. 


 난 오늘도 한 번 사는 인생을 위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집어먹었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서 벌건 떡볶이를 집어 먹고 있으니 마치 구치소에서 시킨 설렁탕처럼 깍두기 국물과 같은 찐한 친밀감이 들었다. 다들 먹고 나도 먹으니 온ᅠ세계의ᅠ평화가ᅠ여기 고인듯했다. 최근ᅠ다이어트에ᅠ지쳤던ᅠ내 뇌가 이상반응을 일으키는지 완전히 이성을ᅠ잃고 평소보다 더 먹어버렸다. 금기시했던ᅠ짠ᅠ국물도ᅠ한ᅠ컵ᅠ마시고, 내친김에ᅠ방금 튀긴 김말이도 두 개 시켰다. 그래도 마음의 위안이 필요해서 단백질 보충한다고 떡볶이 국물에 달걀도 다섯 개나 먹었다. 물을 한 모금하고 두루마리 휴지로 입을 닦으며 주위를ᅠ둘러봤더니ᅠ한 여성분이 흰 블라우스에 묻지 않게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고 녹차ᅠ호떡을 먹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것이 눈으로는 스마트폰을 응시하면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혀ᅠ깨물었나보네.ᅠ아프겠다. 그러게ᅠ좀ᅠ천천히ᅠ들지.' 잘ᅠ차려입은ᅠ회색ᅠ정장ᅠ스커트ᅠ끝단이ᅠ아까ᅠ내린ᅠ소낙비ᅠ때문인지ᅠ살짝ᅠ젖어ᅠ있었다. 그녀는ᅠ코를ᅠ훔치고ᅠ물도ᅠ마셨지만ᅠ쉽지ᅠ않은ᅠ눈치였다. ‘이럴ᅠ땐ᅠ쳐다보지ᅠ않는ᅠ게ᅠ예의지.’ 그는ᅠ남사스러운지ᅠ고개를ᅠ돌리고 눈치 없이 배어나는ᅠ물기를ᅠ닦아냈다. 아무리 봐도 혀를ᅠ깨문ᅠ건ᅠ아니었다. “깊은 후회, 자책”이라는 뜻을 가진 remorse의 어원이 살짝 깨문다는 말이라던데, 어쩌면 혀 대신 기억의 한켠을 깨물어서 아픈게 아닐까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저 맛있는 호떡을 먹으면서 울기까지 할까. 불티나게 팔리는 호떡을ᅠ신명 나게 부치던ᅠ사장님도ᅠ그가ᅠ안쓰러웠던지ᅠ어묵ᅠ국물을ᅠ가득ᅠ채워주셨다. 그는ᅠ고맙다는 말로 화답하며 양손으로 국물을 받았다. 길게ᅠ한숨을ᅠ내쉬고는ᅠ호떡을 마저ᅠ다ᅠ먹었다. 걷는ᅠ뒷모습이ᅠ비척거렸다. 난 신경이 쓰여서 결국 사장님에게 말했다. ‘저도 녹차 호떡 하나 주세요.’


 초밥 세트로 단백질이 풍부한 저녁을 먹으려던 계획은 무산됐지만, 녹차 호떡이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뱃속에 나트륨과 트랜스지방이 가득했지만 푸근한 포만감이 몸을 덥혔다. 식사는 내게 있어 삶의 활력이다. 난 공복에 몰리면 날이 선다. 짜증과 무기력에 일과를 망치고야 만다. 점심 식사에 막 튀긴 돈까스가 나오면 보고서가 잘 풀리고, 고깃집에서 저녁 식사 약속이 잡히면 안 풀리던 글도 술술 풀린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면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그런 새벽이면 라면이 끓는 환영에 시달린다.


 식사의 중요성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에서 레드(모건 프리먼 분)는 20년 넘는 장기복역순데, 그는 이제 누가 봐도 밖으로 나설 준비가 된 사람이다. 생의 끄트머리에 자유를 맛보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오죽할까.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석방 신청을 하며 나갈 날만 기다린다. 그는 말한다. 이제 충분히 반성했고 사회에 나가서 잘해볼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가석방 심사관은 매해 그를 심사에서 떨어뜨린다. 그들은 왜 이 노인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 아마도 반성하는 기색보다 더 중요한 건 순전히 운일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뇌과학책에 의하면 가석방 심사가 열리는 시간에 따라 가석방율이 유의미하게 다르다는 걸 밝혀냈다. 물론 식사 직후로 잡으면 석방률이 올라가고,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만큼 허기는 우리의 이성을 지배한다. 레드의 경우라면 식사는 누군가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부터 난 상부에 보고할 때 주로 점심시간이 끝난 디저트 타임을 애용한다. 되도록 너그러울 때 일 얘기를 꺼낸다. 사람 다 똑같아서 이른 아침부터 뭐가 문제다 뭐 좀 승인해달라 조르면 짜증만 나기 마련이다.


 본론으로 식사는 운동 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보통 체중감량을 위해서 공복 운동을 하라고 하지만, 근력을 늘리는 운동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상태는 소화된 후다. 그 과정에서 피가 잘 돌고, 몸에 힘이 붙는 게 느껴진다. 내가 평소에 다이어트를 하는 이유는 날씬한 몸 때문이지만, 꾸준하게 챙겨 먹는 이유도 더 나은 운동 수행능력을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뭘 먹는지가 참 중요하다. 이왕이면 삼겹살 대신 닭가슴살로 바꿔야 하고, 우아하게 튀김옷을 벗기고 먹어야 거울 앞에서 턱을 치켜들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무수한 디저트가 있다. 극단적인 탄수화물과 지방을 자랑하는 빵과 쿠키가 악마의 유혹처럼 도처에 도사린다. 마음 같아서는 도시의 차가운 남자처럼 씁쓸한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만족하고 싶지만, 매일 허덕이면서 보고서를 쓰는 나로서는 도너츠의 달착지근하고 기름진 맛을 이겨내기가 어렵다. 마치 환각 작용처럼 하루의 피곤을 잊게 하는 당의정의 힘이다.


ᅠ이승우 작가의 소설 <사랑애 생애>에는 식습관을 트집 잡아서 연인과 헤어지는 남자가 있다. "선희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그가 찾아낸 결점은 도넛이었다. 커피를 기름에 설탕 범벅인 도넛과 마시다니. 애들도 아니고 원... 그는 그것이 대단한 과오라도 되는 것처럼 흠을 잡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 내 단언컨대 딸기잼이 가득 찬 던킨도너츠의 맛을 모르는 사람과는 좋은 연애를 할 수 없다. 당분과 밀가루가 주는 평화로운 감각을 모르는 자와 어떻게 생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을까. 어쩌면 설탕과 밀가루야야말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비밀의 열쇠일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나는 이 도넛혐오론자의 망언을 읽을 때조차 도넛이 너무 먹고 싶어서 군침이 돌았다. 뜨거운 커피에 살짝 담가서 먹으면 자비 없이 펼쳐지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내전도 얼마간은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우스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군인들이 도넛을 먹으면서 평화를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푸틴은 장수할테니 기름긴 고기나 드시라지.


 카페에 들르기 전에 내일 아침에 먹을 단팥빵을 사려고 뚜레쥬르에 들렀다. 단팥빵에 관해서라면 영화 <옥희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과 송교수(문성근 분)는 계절학기 수업을 위해 건대 캠퍼스에 도착해서 미리 사 온 팥빵과 커피를 마신다. 서울에 대대적인 폭설이 와서 그런지 시간이 다 됐는데 학생들이 한 놈도 보이질 않는다. 잔뜩 화가 난 송교수는 말없이 커피와 함께 팥빵을 먹어 치우며 교수를 떼려치려고 마음 먹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이건 너무 쪽팔려. 이 짓도 당장 그만둬야겠어.’ 그때 눈 내린 건국대 캠퍼스 정문으로 옥희가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온다. 이어서 텅 빈 강의실에서는 수업 대신 조심스럽게 건넨 삶에 관한 Q&A시간이 시작된다. 이 런 장면들이 왜 좋은지 모르겠지만 난 가끔 송교수와 옥희를 떠올리며 팥빵을 산다. 송교수가 빵을 다 먹고 창밖을 보며 담배를 한 대 피울 때 늘 보던 거리에서 낯선 정경이 펼쳐진다. 눈 덮인 도시는 기능을 멈춘 공장처럼 삭막해 보이지만, 유심히 보면 귀여운 사람들이 뒤뚱거리며 낭만을 즐기고 있다. 기능을 멈춘 도시는 잠을 자듯 고요하고, 뜨듯한 커피와 갓 구운 팥빵이 평소라면 의식하지 않았을 삶의 시간을 상상케 한다. 난데없는 폭설이 그에게 건네 온 질문이다.


ᅠ막상 빵집에 들어서니 내 맘 같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오만가지 맛있는 빵들이 즐비했다. 특히 설탕 바른 작은 페이스트리 여섯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구웠는지 봉투가 열려있다. 계피를 두른 속살엔 호두인지 아몬드인지 모를 가루가 잔뜩 묻어있고, 생크림은 용케도 꽉꽉 채워져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향한 집착처럼 나도 페이스트리에 꽂혀있다. 겹겹이 쌓인 부드러운 속살과 버터와 설탕으로 두룬 포화지방이 향긋한 냄새를 솔솔 풍겼다. 아무래도 오늘은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프루스트처럼 잃어버린 뭔가를 되찾진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치팅데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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