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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02. 2021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잖아

소재 <치팅데이>

 퇴근 후에 운동을 하고 평소 자주 가던 초밥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납작 만두와 호떡을 종이컵에 받아서 먹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떠들썩한  오늘 오픈한 분식집인 모양이다사장님의 분주한 손짓에 사람들은  원짜리 한두 장을 내고 열심히 먹고 있었다정말 열띠게들 집어 먹었다 한마디 없이 묵묵히 허기를 지워내는 것처럼 보였다허기진 퇴근길왠지 그냥 가기 아쉬운 분위기였다.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느닷없이 오늘을 치팅데이로 정했다. 치팅데이(Cheating Day)는 '(몸을) 속인다'라는 뜻의 'Cheating'과 '날(日)'이라는 뜻의 'Day'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로, 식단 조절 중 부족했던 탄수화물을 보충하기 위해 1~2주에 한 번 정도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는 날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몸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인다는 점이 부작용이긴 하다. 허기의 치팅으로 마음이 편해진 나도 사람들 옆에 서서 먹기 시작했다다들 먹고 나도 먹으니  세계의 평화가 여기 고인듯했다최근 다이어트에 지쳐있던  배도 이성을 잃고  기름진 튀김들을 받아들였다금기시했던  국물도   마시고내친김에 옆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도  접시 주문했다그러다 주위를 둘러봤더니  여성이 스마트폰을 보며 녹차 호떡을 먹다 말고 훌쩍거리는  눈에 들어왔다. ' 깨물었네 아프겠다그러게  천천히 들지.'  차려입은 회색 정장 스커트 끝단이 아까 내린 소낙비 때문인지 살짝 젖어 있었다그녀는 코를 훔치고 물도 마셨지만 쉽지 않은 눈치였다. '이럴  쳐다보지 않는  예의다. 그녀는 남사스러운지 고개를 돌리고 열심히 눈에 비어지는 물기를 닦아냈다힐끔 보니 혀를 깨문  아닌 모양이었다카톡이 문제였을까생리적인  아니라 심리적인 거였나무슨 내용이길래 울기까지 할까. 열심히 호떡을 부치던 사장님은 그녀가 안쓰러웠던지 어묵 국물을 가득 채워주셨다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저  먹고 자리를 떴다걷는 뒷모습이 비척거렸다.


 깔끔하게 초밥 세트로 단백질이 풍부한 저녁을 먹으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내일도 연어와 광어는 날 반겨줄 테니 오늘은 분식이면 족했다. 마지막으로 먹은 맛있는 납작 만두 덕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뱃속에 나트륨과 트랜스지방이 가득했지만 푸근한 포만감이 몸을 덥혔다. 식사는 내게 있어 활력이나 의욕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난 공복에 몰리면 날이 선다. 짜증과 무기력을 오가면서 일과를 망치고야 만다. 점심 식사가 기가 막히면 보고서가 잘 풀리고, 저녁 식사가 푸짐하면 블로그에 올릴 글이 술술 나온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면 꿈자리가 뒤숭숭해진다. 나처럼 하루 세끼를 다 챙기는 사람은 비관주의자가 될 수 없다. 적어도 하루 세 번은 신이 나니까. 내가 평소에 다이어트를 하는 이유도 꾸준하게 먹기 위해서다. 하루 세 끼를 두 번으로 줄이고, 한 그릇을 세 숟갈 정도로 덜어내야 체중 관리가 된다. 삼겹살 대신 닭가슴살로 바꿔야 하고, 이왕이면 튀김옷은 벗겨야 거울 앞에서 턱을 치켜들 수 있다.


 이처럼 식사의 중요성은 영화 <쇼생크 탈출>에 잘 드러난다. 영화에서 레드(모건 프리먼 분)는 20년 넘는 장기복역순데, 그는 누가 봐도 진심인 게 역력한 얼굴로 가석방 신청을 한다. 이제 충분히 반성했고 사회에 나가서 잘해볼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심사관들은 매해 그를 떨어뜨린다. 그들은 왜 이 연기파 배우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 뇌과학책에서 읽은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석방 심사가 열리는 시간을 식사 직후로 잡으면 석방률을 높아진다고 한다. 즉 배가 고픈 점심 전이나 늦은 오후에 심사를 받는 것보다 식사 후의 포만감이 느껴질 때를 노려야 한다. 레드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결과가 좀 달라졌을까. 이처럼 식사는 누군가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부터 난 상부에 보고할 때 주로 점심시간이 끝난 디저트 타임을 이용한다. 사람 다 똑같아서 이른 아침부터 뭐가 문제다 뭐 좀 승인해달라 조르면 짜증만 나기 마련이니까. 


 이승우 작가의 소설 <사랑애 생애>에는 식습관을 트집 잡아서 여자 친구와 헤어지려는 남자가 나온다. "선희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그가 찾아낸 결점은 도넛이었다. 커피를 기름에 설탕 범벅인 도넛과 마시다니. 애들도 아니고 원... 그는 그것이 대단한 과오라도 되는 것처럼 흠을 잡았다." 어처구니없지만, 딸기잼이 가득 찬 던킨도너츠의 맛을 모르는 사람과는 좋은 연애를 할 수 없다. 당분과 밀가루가 주는 평화로운 감각을 모르는 자와 어떻게 생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을까. 어쩌면 설탕과 밀가루야야말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비밀의 열쇠일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조차 도넛이 너무 먹고 싶었다. 뜨거운 커피에 살짝 담가서 먹으면 삼 일간 지속되던 가자 지구 공습도 멈출 수 있을 것만 같다.


 배가 불러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내일 아침 먹을 단팥빵을 사려고 뚜레쥬르에 들렀다. 단팥빵에 관해서라면 영화 <옥희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과 송교수(문성근 분)는 계절학기 수업을 위해 건대 캠퍼스에 도착해서 미리 사 온 팥빵과 커피를 마신다. 서울에 폭설이 와서 그런지 수업시간이 다 됐는데 학생들이 한 놈도 없다. 잔뜩 화가 난 송교수는 말없이 커피와 함께 팥빵을 먹어 치운다. 영화에 등장하는 눈 내린 캠퍼스, 텅 빈 강의실로 걸어오는 옥희(정유미 분), 수업 대신 조심스럽게 건넨 삶에 관한 질문이 기억을 떠나지 않는다. 이 장면이 왜 좋은지 모르겠지만 난 가끔 송교수를 떠올리며 팥빵을 산다. 그가 빵을 다 먹고 창밖을 보며 담배를 한대 피울 때 삶을 낯선 정경이 펼쳐진다. 눈 덮인 도시는 기능을 멈춘 공장처럼 삭막하기만 하다. 평소 거닐던 거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눈덩이가 그의 속내를 복잡하게 한다. 그는 마치 낯선 곳에 떨어진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건 평소라면 의식할 수 없는 벌어진 틈에 가깝다. 난데없는 폭설이 그에게 건네 온 질문이다.

 막상 빵집에 들어서니 내 맘 같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오만가지 맛있는 빵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설탕 바른 작은 페이스트리 여섯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구웠는지 봉투가 열려있다. 계피를 두른 속살엔 호두인지 아몬드인지 모를 가루들이 잔뜩 묻어있고, 생크림은 용케도 꽉꽉 채워져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향한 집착처럼 나도 페이스트리에 꽂혀버렸다. 포화지방이 가득 찬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프루스트처럼 잃어버린 뭔가를 되찾진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치팅데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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