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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6. 2021

모든 날이 일요일 같았으면

운동 <공원산책>

 일요일 아침 불쾌한 기분으로 동네 공원을 찾았다. 오 분 거리라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뻐근해진 목을 연신 문지르며 걸어갔다. 괜한 심술과 함께 찾아온 요사스러운 감정이 목 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젠지 알 수 없었다. 짜증이 짜증 나는 건 원인미상이기 때문이다. 타깃이 없으니 분풀이할 곳도 없다. 그저 녹음에 둘러싸인 채 걷다 보면 머리가 개운해질 거라고 믿고, 나미아비타불. 모든 날이 일요일만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공원 입구부터 태연자약한 사람들이 보였다. 어찌나 희희낙락한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린 풍경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엘라 휠러 월콕스'의 유명한 시구가 떠올랐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그래, 나 혼자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이게 다 호르몬 탓이야. 주머니에 넣어둔 ABC초콜릿을 씹으며 당을 챙겼다. 초콜릿과 커피야말로 현대인의 마약 아닌가. 심기일전하는 자세로 기지개를 켰다. '나는 그냥 햇빛과 산책이 필요했을 뿐이야.' 공원을 뛰노는 개와 배드민턴을 치는 한갓진 사람들을 보니 새삼 대도시가 추구하는 사랑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공원에 앉아서 잘 살펴보면 사랑 공식이 한눈에 들어온다. 1. 눅눅한 기분을 햇볕에 말려라. 2. 크게 심호흡을 하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걸 상기하라. 3. 이어폰 볼륨을 높여서 서정적인 기운에 휩싸여라. 4. 번뇌를 끊고 무념, 무상, 무아에 들어서라.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도 똑같았다. 부모님이 일요일마다 중앙공원에 가서 돗자리를 깔고 뭘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뭘 해. 그냥 공원에 왔다는 게 중요한 거지. 혹독한 월요일이 시작되기 전에 행복한 중산층 흉내는 내야지.' 딱 사회에서 학습한 행복 추구법이었다. 도시개발 계획에 근린공원이 블록마다 박혀있는 이유가 다 있다. 국가가 장려하는 스트레스 해소 방식이다. 사회생활로 독소가 쌓여가는 이들에게 공원만 한 디톡스가 어디 있을까. 스타벅스는 프라푸치노는 해독주스에 가깝다. 그러니까 익숙한 건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산책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주말마다 교외로 데이트를 떠나는 연인이 어떻게 매번 인스타그램 속에서 환히 웃을 수 있는지 생각해봤나. 돈은 돈대로 들이고 고속도로엔 차가 쌓여가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 즐거울까. 그것도 다 우리가 행복한 데이트가 무엇인지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면 행복도 납득할 수 있다. 웃어 마땅한 휴일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충실히 따르면 플래시가 터질 때 입꼬리를 자동으로 올라선다. 난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만사가 귀찮고 몸이 천근만근이더라도 공원을 찾아야 한다. 산책이라는 관념 속에 들어가서 의심의 여지없는 행복을 누려 마당하다. 익숙한 패턴으로 진입하면 정품 정량의 행복을 주유할 수 있다.


 취업한 이래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면서 내 고유한 필치를 찾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어쩔 땐 글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현실감각을 잊고 고립되기도 했다. 내가 패턴에서 벗어나 고유해진다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혼자이기 때문이다. 어디론가 내몰린 느낌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가나슈 케이크를 시키지만 싱숭생숭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익명 댓글로 스트레스를 풀어보려고 댓글에 막말을 적다가 마음을 고쳐먹기 일쑤다. 그럴 때 공원에 가서 군중 속 박 아무개로 변신한다. 녹음이 우거진 공원 안에 편입하면 다시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세납자로 탈바꿈한다. 공원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광배근이 발달한 철봉 달인이다. 썸 리스 그립으로 쇳덩이와 싸움하는 까까머리 형이다. '얘들아 나 백수아냐.'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공원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에게서 '키치'를 발견해낸다. 고약한 늙은이 심보처럼 작가는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냐며 요란을 떠는 도시인을 비꼰다. 마치 공익광고처럼 짜인 각본 같은 행복을 연기하는 남자를 속물로 치부한다. 내 생각에 쿤데라가 경멸하는 건 전형성에 있다. 밀란 쿤데라 옹에 빙의하여 말해보자면 이렇다. 유력한 정치인이라도 된 것처럼 카메라를 의식하며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작자를 보라.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좀 늘리려고 행복을 연기하는 저 프로들의 허위는 얼마나 역겨운가. 그들이 하는 제스처와 멘트도 다 어느 광고에서 본 대사 같다. 자기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유행어와 밈으로 도배된 흉내에 불과하다. 저들이 공원에서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느낀 사랑은 진짜일까. 쿤데라에겐 창의성이 없는 사랑 표현은 거짓과 다름없다. 세상이 정한 방식대로 반응하는 로봇이라면 거기에서 어떤 감동을 찾을 수 있을까. 꽉 막히고 경직된 사회일수록 학습화된 감동을 따르게 마련이다. 이를 충실히 연기하는 자는 능숙한 샐러리맨으로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 갈지 모르지만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걸 막을 순 없다. '쿤데라 할아범도 공원 많이 다니셨구먼.' 나도 쿤데라의 반골 기질을 흉내내서 더 분방하고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는 글을 쓰리라. 쿤데라 옹이 노벨상을 타는 그날까지 어른들의 거짓된 삶에서 탈피하고자 나 역시 인공물에 침을 뱉기로 다짐했다.  


 이렇게 화창한 오후에 공원 벤치에서 이런 어둑한 다짐이나 하다니. 우리 부모님도 놀라실 거다. '내가 업어 키운 애가 저렇게 삐뚤어졌다고.' 어머니 장난이고요. 지금 일요일 아침인데 공복이라 날카로워져서 그래요. 밥 먹으러 가기 전에 공원 구석에 있는 철봉을 했다. 실바람에 녹색 광선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오후다. 셔츠를 바지에서 빼내 단추까지 두 개 풀고 턱걸이를 했다. 우리 공원은 체육 시설이 훌륭해서 근력 적합도 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줄 만하다. 자주 오다 보니 드문드문 눈에 익은 사람들도 보인다. 우린 알은체를 안 하지만 이 공원에서만큼은 꽤 친밀한 사이다. 시츄를 키우는 저 고글 청년이라든지, 손주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는 할머니도 이번 달에만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모른다.

 

 작년 겨울 초입에도 이 공원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땐 완전히 이방인이었다.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여기가 내 동네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상태가 완전히 바닥이었다. 그날 분명히 선약이 있었는데 약속한 시각 바로 직전에 바람맞았다.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는 톡 하나로 날 좌절시켰다. 내가 약속 하나에 좌절할 사람이 아닌데 그는 내게 특별했기에 좌절했다. 홧김에 이마트 근처에서 분노의 마라탕을 사 인분이나 흡입했다. 우리 사이는 좀 이상하긴 했다. 다 끝난 마당에 말 그대로 뜬금없는 재회를 하고, 평소였으면 맺지 않을 약속을 했다. 비참하게 버려진 처지는 거부권이 없었다. 더는 기대할 게 없는 사이였지만, 기대를 저버릴 순 없었다. 난 권력관계에 하위에 놓인 약자였다. 생태계로 치면 오리정도. 


 가벼운 차림으로 공원을 거니는 인파 사이에서 무스를 발라 반질반질한 머리를 하고서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궁금했다. 대체 날 바람 맞힐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때 내 앞으로 레깅스 여신이 조깅하며 지나갔다. 어디서 나타난 꽃사슴인지 껑충껑충 바삐 뛰던 그녀는 광고모델 같았다. 혼자 광고를 찍듯 사뿐사뿐 누볐다. 난 즉시 불편한 차림으로 공원을 뛰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지치는 줄도 모르고 그녀를 따라 열 바퀴나 뛰었다. 포레스트 검프라도 된 것처럼 나이키 신발을 신고 가슴이 터져라 뛰었다. '저 사람 선순가?' 그는 종일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살아있는 무언가와 같은 감각 맛봤다.  


 공원 한구석에 작은 연못이 있다. 가끔 그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청승맞게 옛날 생각을 한다는 건 내 안에서 강렬한 정념이 타오른다는 말이다. 그것이 지난날을 향한 그리움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것은 오히려 지나간 시절을 떨쳐내는 의식에 가깝다. 만성적인 포기의 자세로 재고를 처리하는 시간이다. 본전 생각나기 전에 도매상에 싼값에 넘겨버린다. 모든 이상이 다 실현 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시절. 보통의 출세와 보통의 결혼에 대한 기대가 아직은 시시하게 보였던 시절. 절대로 그렇게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걸 정확하게 적시했던 깍두기 시절. 난 모든 기억을 공원 벼룩시장에 내놓았다. 다리를 꼬고 양팔을 벤치에 걸친 채 외친다. '자 골라요 골라 쌉니다. 부담 없이 집어 가세요' 그럴 때 가끔 오리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연못이라 오리 떼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지만 그래도 제집이라고 떠나진 않는다. 몸을 긁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한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모든 과목에서 낙제하고 퇴학당한 가출청소년 홀든 콜필드는 난데없이 택시에 올라타서 오리를 지켜주고 싶다고 난리를 피운다. “이것 봐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사우스 있는 연못에 오리가 있죠? 연못이 꽁꽁 얼어붙으면 오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세요? 운전사는 마치 미친 사람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였다." 뉴욕의 택시 드라이버는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오밤중에 택시에 타서 오리 멱따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가뜩이나 손님이 없어서 화딱지 나는데 헛소리나 삐악삐악해대다니. 그는 젖 먹던 힘으로 홀든에게 욕을 퍼붓는다. 영어 욕이라 적진 못하겠다. 홀든은 기가 죽어서 근처 술집으로 도피한다. 거기서 아무도 걱정해주지 않는 오리의 사정을 염려하며 술을 마신다. 그래 너 파수꾼답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마다 늘 이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비웃음은 아니다. 난 이래 봬도 예나 지금이나 홀든의 오리 걱정에 이입하는 사람이다. 공원에 사는 오리를 지켜주고 싶은 감정이야말로 요즘 같은 감수성의 시대가 신봉해야 하는 정서가 아닐까.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천사가 있고, 모란시장에 갇힌 믹스견을 구해내는 의인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를 보살펴주고 싶은 소년의 마음은 지켜줘야 마땅하다. 물론 홀든의 오리 걱정을 마냥 순수하게만 볼 순 없다. 사실 홀든은 관종일 뿐이다. 만약 홀든이 살던 시절에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기껏해야 눈물 셀카나 올리지 않았을까. 마땅한 꿈이나 계획도 없는 소년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꼰대의 잔소리를 피해 달아났지만 더는 갈 곳이 없어진 홀든은 이제 더럽고 추악한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한다. 최저임금이 만원을 훌쩍 넘어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늦기 전에 그레타 툰베리처럼 기후 문제나 동물권 향상을 위한 환경운동가로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 툰베리는 학위 없이 최연소로 타임스지 올해의 인물이 됐으니까. '블루 오션이야 친구.' 어쨌든 난 홀든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어른답게 그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나도 이렇게 공원에서 이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으면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니까. 나도 저 오리처럼 작고 소박하게 살고 싶으니까.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라도 내고 싶은 어른이다. 커다란 대의와 목표에 휘둘리기보단 차라리 저 하늘로 흩어지는 검은 매연이 되고 싶다.  


 이처럼 오리의 행방까지 걱정했던 홀든 콜필드를 창조한 작가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다. 은둔자에 지독한 열등감 덩어리로 알려진 이 유명한 양반은 평생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싫어했다. 사연이 꽤 흥미롭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세계대전 당시 종군작가로 여러 부대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샐린저가 복무하는 부대도 방문했다. 헤밍웨이는 이때 선물로 받은 독일제 루거 권총의 성능을 시험한답시고 옆에 있던 닭을 날려버렸다. 이를 전해 들은 샐린저는 헤밍웨이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겨울철에 오리가 어디 가서 쉬는지까지 근심하는 작가에게 헤밍웨이는 얼마나 인간 이하로 보였을까. 그 닭이 비록 저녁 밥상에 나올 씨암탉이라 해도 샐린저는 헤밍웨이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문학에서 주인공이 성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늘 동물을 죽이는 장면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둘은 상극이 맞다. 그래서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의 입을 빌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가짜 문학이라고 깎아내렸다. 아마 샐린저에게 헤밍웨이는 택시에서 오리는 무슨 오리냐며 버럭 화를 내던 택시기사보다도 못한 존재였으리라.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공원에서 칼로리를 소비하는 몇몇 러너들이 보였다. 홀든 콜필드처럼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고독하게 땀을 냈다. 값비싼 나이키와 언더아머 옷을 입는 그들은 에어팟을 귀에 꽂고 지긋지긋한 살이 더는 붙지 못하도록 몸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난 이제 더는 못뛸 것 같아서 러닝을 멈추고 샐러드 가게로 향한다. 오늘은 날이 따사로워 평소보다 땀으로 푹 젖었다. 이 낯선 도시에서 이제 반년 가까이 살아왔다. 그간 새로운 집에 정을 붙이고 내 생활패턴을 찾느라 고생깨나 했다. 요샛말로 제너럴리스트처럼 일상을 평평하게 다지는 데 주력했다. 쓸데없이 침대에서 유튜브나 보면서 시간을 소모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특히 육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난 몸이 단단해져야 고개를 쳐들 수 있는 사람이다. 잠이 안 올 땐 천장을 보며 양을 샌다. 요즘엔 양 대신 사라져 버린 오리의 행방을 걱정한다. 모두 다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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