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May 06. 2021

모든 날이 일요일 같았으면

운동 <공원산책>

ᅠ일요일 아침 불쾌한 기분으로 동네 공원을 찾았다. 오 분 거리라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뻐근해진 목을 연신 문지르며 작은 트랙을 돌았다. 내 옆으로 팔꿈치를 대차게 흔드시는 할머니가 나를 앞질러 갔다. 백 세 시대답게 트랙을 도는 어르신들 기운이 다 좋아 보였다. 운동이 주는 느낌이란 참 대단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자세를 고쳐 잡게 만들었다. 걷기 운동은 몸은 물론이고 뇌도 젊게 만든다던데 이게 다 장수의 비결이구나 싶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근처가 실버타운이라서 그런지 레깅스가 나시를 입은 젊은 친구들보다는 나이 드신 어르신이 대다수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공원을 꽤 크게 조성해서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점차 다니다 보니 탑골공원 분위기가 더 났다.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 나무에 등을 부딪치는 할머니, 거꾸로 걷는 아주머니까지. 아 여기 또 있네. 칙칙한 츄리닝을 입고 할머니를 따라잡으려고 용을 쓰는 머리 뻗친 노총각.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짜증이 났다. 괜한 심술과 함께 찾아온 원인미상의 요사스러운 감정이 뒷덜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원인이 없으면 해결도 불가능하다. 원인이 없으면 그냥 내 탓이니 원망할 데가 없다. 그저 녹음에 둘러싸인 채 걷다 보면 머리가 개운해지리라 믿고 방금 앞서간 할머니를 앞질렀다. '승부다!' 뭐든 좋으니까 모든 날이 일요일만 같으면 행복하겠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공원 풀밭에는 천하 태평한 견주가 모여 있었다. 어찌나 다들 희희낙락 좋아 보이는지 르누아르의 풍경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저게 행복이구나 싶었다. 강아지들은 풀을 파헤치고 드러눕고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과 뒤엉키면서 세상의 평화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시위했다. ‘올드보이’에 나와서 유명해진 '엘라 휠러 월콕스'의 유명한 시구가 떠올랐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난 대체 왜 이 화창한 일요일에 죽상일까. 이게 다 호르몬 탓이야. 주머니에 넣어둔 ABC초콜릿을 씹으며 혹시 모를 당 부족까지 챙겼다. 초콜릿과 커피야말로 현대인의 합법적인 마약이니까. 이러고도 기분이 안 나아지면 다 노화 탓이니까 받아 들여야지 싶었다.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기지개를 켜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파워워킹을 계속하자 말초까지 혈액이 뻗어나가는 게 느껴졌다. 땀으로 노폐물을 배출하고 몸 전체의 신진대사와 교감 신경이 확 살아나면서 스트레스가 점차 풀려갔다. 나는 그냥 햇빛과 산책이 필요했구나. 공원을 뛰노는 개와 배드민턴을 치는 한갓진 자들을 보니 새삼 대도시가 추구하는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ᅠ공원 한쪽에는 공원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추구법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난 그걸 내 식대로 해석해서 읽어 내려갔다. 1. 눅눅한 기분을 햇볕에 말려라. 바짝 말리면 형태조차 사라질 것이다. 2. 크게 심호흡을 하며 굳이 행복할 필요가 없다는 걸 상기하라.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날 불행케 한다. 3. 이어폰 볼륨을 높여서 서정적인 기운에 휩싸여라. 소몰이 발라드보다는 좀 더 있어 보이는 교향곡을 틀어보자. 4. 번뇌를 끊고 무념, 무상, 무아에 들어서라. 너무 생각하지 말자. 생각해 봤자 나아질 게 없다는 걸 알지 않느냐. 생각해 보면 내가 어릴 때도 비슷했다. 부모님이 일요일마다 아파트 앞 중앙공원에 가서 돗자리를 깔고 뭘 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뭘 해. 그냥 공원에 왔다는 게 중요한 거지. 혹독한 월요일이 시작되기 전에 행복한 중산층 흉내는 내야지.' 이거야말로 우리 사회가 권장하는 중산층의 행복 추구법 아닌가. 중산층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쳤던 부모님은 그 공식대로 사셨고, 별 고민 없이 행복하셨다. 도시개발계획에서 근린공원이 블록마다 박혀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조기 교육이 무섭다고 나 역시 일요일이면 동네 공원을 찾아 파워워킹 행렬에 동참하며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려고 주문을 걸었다. 


 주말마다 교외로 데이트를 떠나는 연인이 어떻게 매번 인스타그램 속에서 환히 웃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봤다. 돈은 돈대로 들이고 고속도로엔 차가 쌓여가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 즐거울까. 그것도 다 행복한 데이트가 무엇인지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면 행복도 납득할 수 있다. 웃어 마땅한 휴일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충실히 따르면 짜증이 나다가도 플래시가 터질 때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만사가 귀찮고 몸이 천근만근이더라도 공원을 찾아야 한다. 산책이라는 관념 속에 들어가서 의심의 여지없는 행복을 누려 마 익숙한 패턴으로 진입하면 정품 정량의 행복을 주유할 수 있다.


 어젯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 무렵에 준규의 전화를 받았다. 야 지금 시간이 몇 신줄 아나. 준규는 취했는지 다짜고짜 수정이를 언제 봤냐고 물어봤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득해져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어, 누구? 수정이를 언제 봤냐고? 어 그게, 어 한 이 주 됐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딱히 받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내가 뭘 숨긴단 말인가. 그런데 왜 지금 이렇게 전화를 받는 게 꺼려지는 걸까. 


 수정이가 나와 병수가 있는 동네 통닭집을 찾은 건 며칠 전이었다. 병수와 나는 늘 그렇듯이 맛초킹에 콜라를 시키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리 뒷자리에서 혼자 치킨에 소주를 드신 아저씨가 자꾸만 우리 얘기를 듣고 웃어대서 신경이 쓰였지만, 나나 병수나 한마디 할 성격은 아니어서 그냥 참고 떠들었다. 그날 병수네 집에서 ‘폭스파이어’라는 영화를 보고 우린 갑론을박을 벌였다. 영화의 심오한 정치성과 주제 의식에 관한 얘기였다며 좋았겠지만, 우린 여주인공 중에 누가 더 예쁘냐를 두고 겨뤘다. 여배우들이 마치 제 여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편을 먹고 싸웠다. 일요일마다 와서 시끄럽게 구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병수 어머니는 빨리 가라는 눈치를 줬고, 우린 배수구에서 물이 빠져나가듯이 치킨집으로 흘러들어왔다. 난 마치 일급 변호사처럼 조목조목 왜 주인공 랙스가 더 아름다운지 얘기했다. '무쌍에 저 정도 얼굴이 나오기 쉽지 않다. 그리고 키도 더 크고 목소리도 좋잖아.' 이렇게 말하면서 병수 넌 예나 지금이나 참 보는 눈이 없다고,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없는 거라고 인신공격을 보탰다. ‘병신아 네가 그러니까 여자를 못 만나지. 눈이 좆만 해서 그런가.’ 병수는 지지 않고 발끈했다. ‘너는 눈깔이 동태라서 랙스같이 발랑 까진 애를 싸고도냐. 그러니까 만나는 여자마다 다 차이지.’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되어버리자 우린 극 중 인물의 외모뿐 아니라 집안 환경과 성격까지 거론하며 다퉜다. 도대체 뭘 위한 쌈질인지. 그냥 매우 심심한 밤이었고, 주말에 얘랑 이러고 있는 게 한심스러웠다. 그때 수정이가 통닭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뭐야. 수정아 웬일이야. 준규도 같이 왔어?' 난 준규가 들어오는지 뒤를 살폈지만 수정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집에서 치맥 하냐? 치킨 가지러 온 거야?’ 남색 파카에 통이 큰 바지를 입고 온 수정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병수한테 지금 여기 온다고 얘기했는데.’ 내가 병수를 쳐다보니, 병수는 허둥지둥 대더니 상황을 수습했다 '미안해 수정아. 영화 보다가 문자온 걸 깜빡했다. 치킨 시켜줄까.' 수정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발골 작업을 끝낸 테이블 앞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그리고 치킨 대신 오백 하나를 주문해서 골똘히 응시했다. 수정이가 꺼낸 얘기는 특별한 게 없었다. 부부라면 의례 그럴만한 일이었다. 준규의 빚보증과 관련한 대학 휴학, 급전이 필요해서 한 대리운전, 손님과 시비가 붙어서 잡혀간 파출소, 알바비를 다 날려버린 벌과금과 급하게 취직한 바벨론이라는 대부업체까지. 병수랑 난 익히 들어서 아는 내용이었지만, 웬일인지 수정이는 처음 듣는 눈치였다. 수정이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자기만 까맣게 모르고 결혼까지 할 때 왜 아무도 귀띔해주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다. 잠잠히 듣던 병수는 다소 황당하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그런 걸 안 알아보고 결혼을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우린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그래도 사랑하니까 그런가 보다 한 거지. 만난 지 넉 달만에 결혼한 건 너지 우리가 등 떠민 게 아니잖아.’ 갑자기 목소리가 이혼 전문 변호사처럼 바뀐 병수가 조마조마하면서도 속이 다 시원했다. 살면서 눈치라는 걸 가져보지 못한 병수가 이럴 땐 도움이 된다 싶었다. 병수는 화룡점정을 찍었다. '네 콩깍지가 사라진 걸 우리 탓으로 돌리면 안 되는 거야. 지금 상황이 나쁜 걸 잘 해결할 수 있게 우리가 도와줄 수는 있어.' 옆에서 듣던 난 바짝 졸아서 나나 병수나 무슨 말이든 쉽게 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 이해해 달라고 미안하다고 달랬다. 뭐가 맞는지 아직도 헷갈리지만 난 우선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다. 내 지론상 부부 사이에 끼는 짓은 음주운전, 폭식과 함께 삼대 바보짓 중 하나니까. 그래서 대충 위로해 주고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준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뻔한 그림이 그려졌다.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부정하고 변명을 일삼는 준규에게 수정이는 아마도 나와 병수한테 다 들었다고 얘기했겠지. 우리가 얘기하지도 않은 것까지 우리 탓을 하며 이실직고하라고 소리를 질렀겠지. 병수와 내 차이가 있다면 한창 일길하던 병수는 이럴 땐 무책임하고 교활하게 전화를 피했을 테고, 난 벨이 울리자마자 습관처럼 받은 것뿐이었다. 


 준규는 내 얘기를 다 듣더니 한숨을 푹 쉬고 침묵했다. 다시 말문을 연 준규는 그냥 모른다고 하지 그랬냐고 혼잣말 비슷하게 따져 물었다. 난 위축돼서 말은 병수가 다했다고 얘기하지 못했다. 준규는 준규대로 기분 나쁜 척을 안 하려고 했지만 침묵 속에 검은 타르처럼 끈끈한 분노가 흘러내렸다. 난 변명조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어서 넘겼는데,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서 말해봤자 상황만 복잡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얘기했다. 사람이 실수하기란 정말 쉽다. 신빙성 있는 변명거리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나 자신에게도 빈약하게 느껴지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당초 내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결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난 두 사람의 갈등을 구경만 했지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나와 무관한 얘기라고 생각하며 심상하게 넘겼다. 이런 내 태도를 이해했는지 준규는 그 어떤 속마음도 내비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한참을 침대에 누워서 나의 무신경함을 저주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야 나는 이제 더는 준규와 편하게 지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나 역시 준규의 오해를 풀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어차피 우리 관계는 몇 해 전부터는 삐그덕거렸으니까. 예전처럼 모든 걸 털어놓는 사이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최근에는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도 없었다. 우린 어느 순간부터 관계는 유지하되 아무것도 털어놓진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사이로 지냈다. 준규는 정말 내가 믿을 만한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서른 중반이 훌쩍 넘으면서 친구가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친구보다는 문화생활을 하는 게 더 풍요롭다고 믿었다. 시간 날 때 홍대클럽보다는 헬스클럽에 가는 게 내게 이롭다고 여겼다. 마찬가지로 가족도 점점 더 멀리했다. 쉬는 날에 변덕스러운 친구와 술을 먹는 것보다는 오늘처럼 산책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다. 근데 시간이 좀 지나니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모든 친구와 멀어진 요즘에는 외롭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문화생활과 운동으로 일상을 가득 채웠지만, 진솔한 대화를 한 지는 오래였다. 설문조사 회사 빼고는 통 울리지 않는 내 아이폰을 보면서 이렇게 고립되는 건 아닌가 불안해졌다. 최근에는 관계가 끝맺을 때 서툴렀다는 후회도 많이 했다. 안 좋게 끝을 내니 그만큼 심적인 동요가 오래갔다.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망가진 관계를 방치했더니 마침표가 엉뚱한 곳에 찍혔다. 


 오늘도 하나의 망가진 관계를 짊어지고 공원을 걷고 있다. 인간관계로 쌓인 독소가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디톡스 효과를 자아냈다. 땀을 잔뜩 흘린 채 스타벅스로 향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아무리 읽어봐도 실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스타벅스는 프라푸치노는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해독주스에 가깝다. 


ᅠ스타벅스에 앉아서 노트북을 폈다. 글쓰기 역시 홀로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취득한 취향이다. 취업한 이래 줄곧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면서 내 고유한 필치를 찾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친구가 사라진 공백을 잘 쓴 문장으로 매웠다. 하지만 어쩔 땐 글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현실감각을 잊고 고립됐다. 내가 패턴에서 벗어나 고유해진다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혼자였기 때문이다. 어디론가 내몰린 느낌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가나슈 케이크를 시켰지만ᅠ싱숭생숭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익명 댓글로 스트레스를 풀어보려고 댓글에 막말을 적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지우기 일쑤였다. 그럴 때 공원에 가서 군중 속 박 아무개로 변신했다. 녹음이 우거진 공원 안에 편입하자 다시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세납자로 탈바꿈했다. 공원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광배근이 발달한 철봉 달인이다. 썸 리스 그립으로 쇳덩이와 싸움하는 까까머리 형이다. '얘들아 나 백수 아냐.'


ᅠ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공원 잔디밭에서 뛰노는ᅠ아이들에게서 '키치'를 발견해 낸다. 고약한 늙은이의 심보처럼 작가는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냐며 요란을 떠는 도시인을 비꼰다. 마치 공익광고처럼 짜인 각본 같은 행복을 연기하는 남자와 가족들을 세상을 지루하게 만드는 족속으로 치부한다. 내 생각에 쿤데라가 경멸하는 건 전형성에 있다. 밀란 쿤데라 옹에 빙의하여 말해보자면 이렇다. 유력한 정치인이라도 된 것처럼 카메라를 의식하며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작자를 보라.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좀 늘리려고 행복을 연기하는 저 프로들의 허위는 얼마나 역겨운가. 그들이 하는 제스처와 말투도 다 어느 광고에서 본 대사 같다. 자기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유행어와 밈으로 도배한 흉내내기에 불과하다. 저들이 공원에서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느끼는 사랑은 진짜일까. 모성과 부성마저도 사회에서 배운 관념 아닐까. 쿤데라에겐 창의성이 없는 사랑 표현은 거짓과 다름없다. 세상이 정한 방식대로 반응하는 로봇이라면 거기에서 어떤 감동을 찾을 수 있을까. 꽉 막히고 경직된 사회일수록 학습화된 감동을 따르게 마련이다. 이를 충실히 연기하는 자는 능숙한 샐러리맨으로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 갈지 모르지만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걸 막을 순 없다. '쿤데라 할아범도 공원 많이 다니셨구먼.' 나도 쿤데라의 반골 기질을 흉내 내서 더 분방하고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는 글을 쓰리라. 쿤데라 옹이 노벨상을 타는 그날까지 어른들의 거짓된 삶에서 탈피하고자 나 역시 인공적인 행복에 침을 뱉기로 다짐했다. 


ᅠ이렇게 화창한 오후에 공원 벤치에서 이런 어둑한 다짐이나 하다니. 우리 부모님도 놀라실 거다. '내가 업어 키운 애가 저렇게 삐뚤어졌다고.' 어머니 장난이고요. 지금 일요일 아침인데 공복이라 날카로워져서 그래요. 밥 먹으러 가기 전에 다시 공원을 찾아 철봉을 했다. 실바람에 녹색 광선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셔츠를 바지에서 빼내 단추까지 두 개 풀고 턱걸이를 했다. 우리 공원은 체육 시설이 훌륭해서 근력 적합도 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줄 만하다. 자주 오다 보니 드문드문 눈에 익은 사람들도 보인다. 우린 알은체를 안 하지만 이 공원에서만큼은 꽤 친밀한 사이다. 시츄를 키우는 저 고글 청년이라든지, 손주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는 할머니도 이번 달에만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모른다. 다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이웃이다. 


ᅠ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공원에서 칼로리를 소비하는 몇몇 러너들이 보였다. 산책은 의외로 칼로리 소모량이 높다. 한 시간 정도 천천히만 걸어도 밥 한 공기는 덜 수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홀든 콜필드처럼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고독하게 페이스를 유지하는 그들이 멋져 보였다. 값비싼 나이키와 언더아머 옷을 입은 무리는 에어팟을 귀에 꽂고ᅠ지긋지긋한 살이 더는 붙지 못하도록 몸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난 지쳐서 무리를 뒤로 하고 샐러드 가게로 향했다. 오늘은 날이 따사로워 평소보다 땀으로 푹 젖었다. 이 낯선 도시에서 이제 반년 가까이 살아왔다. 그간 새로운 집에 정을 붙이고 내 생활패턴을 찾느라 고생깨나 했다. 요샛말로 제너럴리스트처럼 일상을 평평하게 다지는 데 주력했다. 쓸데없이 침대에서 유튜브나 보면서 시간을 소모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번 주는 그런 의미에서 성공적인 한 주였다. 헬스장에 러닝에 걷기에 테니스에 자전거와 글쓰기라는 정신노동까지! 다음 주도 다르지 않은 한 주를 보낼 예정이지만, 식단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전 06화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