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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16. 2021

헬스를 하며 춤과 멀어졌다

소재 <춤>

 요즘 지하철에서 뉴스 대신 재즈를 듣는다. 열차 속 흔들리는 사람들이 꼭 재즈 선율에 맞춰 스텝을 밟는 모양새다. 난 소음을 제거한 이어폰 덕에 삭막한 출근길을 오해하고 있다. 무표정한 그들이 꼭 재즈를 음미하며 몸을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재즈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붐비는 지하철을 떠올릴 것이다. 흔들흔들 비틀비틀 끄덕끄덕. 다들 힘들어 보이지만 재즈다운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옆자리 원피스를 입은 여성분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책을 들고 읽고 계셨다.  제목을 확인하려고 몸을 살짝 구부렸다. 티가 나지 않게 슬쩍 봤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단편집인데  이름이 낯설었다. 그는 몸이 흔들리는데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문장을 하나씩 집어먹고 있었다. 옆에서 불쾌한 밀착이 계속돼도 꿋꿋이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에라도 빠진 사람처럼 그에게 실제는 없고 오직 허구의 세상만 있는 처럼 보였다. 그는  아침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되지만    읽을  있는 숨구멍으로 여길까. 뭐 이 정도면 버틸 만 해. 뭐가 어찌 됐든지 간에 만원 지하철처럼 책에 눈이 가는 시간도 없을 테니까. 그게 재즈이 신간 단편집이 현실을 잠시 잊고 삶을 오해하려는 이들이 아침 감옥을 견뎌낸다. 진짜 감옥은 문이 열리는 출소 후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근 재즈 뮤지션 '윤석철 트리오'의 곡을 들으면서 국산도 미국산 못지않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물론 윤석철 씨도 해외 유학파지만 그래도 엄연히 우리 땅에서 자란 재즈였다. 내가 어릴 적부터 듣던 재즈는 오래된 스탠더드 넘버뿐이었다. 한국 뮤지션은 기껏해야 나윤선 씨나 프렐류드 밴드 정도였다. 내게 익숙한 재즈는 한글로 풀면 제목이 '어느 날 내 왕자님이 올 거야',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을 나뭇잎' 같은 곡들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카페 음악이다. 뮤지션으로 치면 책 읽을 때 선율이 부드러운 '쳇 베이커'나 '빌 에번스'부터 폼 나게 세련된 '데이브 브루벡'의 연주를 듣는다. 듣고 있으면 심란해지는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도 좋아하고, 강하고 묵직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내가 생전 가본 적도 없는 미국 재즈 신에 머물면서 국내 재즈 뮤지션은 모른 척 살았다. 그건 본토 음악도 잘 모르면서 무슨 한국 재즈를 듣느냐는 생각도 있었다. 분명히 홍대든 성수든 어느 뒷골목 건물에서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근사한 곡을 켜고 있었을 텐데, 난 페스티벌 한 번 못가보고 한국 재즈를 평가 절하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검색 신공으로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롱아일랜드재즈밴드'라는 뮤지션을 발견했다.


 롱아일랜드재즈밴드의 히트곡인 <쉘 위 댄스>를 들으면 사랑이 떠오른다. '그래 사랑이란 물어봐 주는 거지.' 춤을 추시겠냐고 묻는 건 함께하고 싶다는 동의어가 분명하다. 그건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경우는 아닐 것이다. 가령 곡을 들으면서 떠올렸던 영화 중에 <쉘 위 댄스>가 그렇다. 매일 격무에 시달리던 중년의 남자는 그날도 밤늦게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 문에 몸을 기대어 잠시 졸던 남자는 창문으로 역 근처 건물에서 한 쌍의 댄서가 춤을 추는 모습을 목격한다. 허름한 건물에서 세상 모든 의미심장함을 모조리 흡수한 거 같은 얼굴로 춤을 추는 댄서들이 그의 눈에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서류 가방을 가슴에 움켜쥐고 댄서의 춤을 응시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느낀다. 불현듯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지 않나. 이튿날 그는 무작정 댄스 강습소를 찾아간다. 그렇다고 그가 춤바람이 들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무실의 꼰대들에게 한 방 먹이는 장면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건 고작 퇴근 후에 조금이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었을 뿐이니까. 영화 <반칙왕>의 송강호도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장렬하게 패배하고 다시 넥타이를 매고 출근길에 나서지 않았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다.


 운동하면서 춤과 멀어졌다. 어릴 적엔 나이트클럽도 종종 가고 그랬는데, 지금은 큰 근육이 붙으면서 몸이 둔해졌다. 내가 놀 수 있는 곳이라고는 헬스클럽이나 기껏해야 독서클럽이다. 그러다가도 가끔 유튜브에서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셀럽을 보면 한껏 부러워진다. 헬스를 안 했다고 해서 춤을 잘 춘 건 아니었지만 두꺼운 몸은 선이 예쁠 수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우아한 춤은 김연아가 하탸투랸의 왈츠곡에 맞춰 연기를 선보일 때다. 리듬을 타고 노는 그 날렵한 몸짓을 넋 놓고 봤다. 내가 다다르지 못할 부드러운 곡선의 세계였다. 근력 운동에 치중하면 스트레칭과 같은 유연성 운동은 등한시한다. 힘겹게 다리 정도는 찢지만 준비운동 정도로 치부하니 점점 몸이 굳어가는 걸 막기 어렵다. 마음은 김연아인데 몸은 뻣뻣하기만 하다. 그래도 춤 영상을 보는 게 좋다. 발을 구르고 턱을 옆으로 흔들면서 리듬감을 찾아간다. 정적인 시간에 엇박자를 타면서 춤을 다시 가까이한다.


 춤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영화 중에 사라 폴리 감독의 <우리도 사랑일까>가 있다. 이 영화는 남편과 잘 살아가던 여인이 건너편 집에 이사 온 잘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불륜 통속극이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뻔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take this waltz'라는 원제가 의미심장하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왈츠곡에 잠시 올라타 보라고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은 어감이다. 아니 조금 더 단호하게 연주가 다 끝나기 전에 남자가 내민 손을 맞잡으라고 강권하는 기분도 든다. 하라고 시키면 더 하기 싫어지는 게 인간인데 이상하게 왈츠는 거부할 수 없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나. 사랑의 동력은 불안이라고.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곳에 사랑이 깃든다. 평탄한 안정은 시종 미지근할 뿐이다. 여인은 그간 쌓아 올린 행복한 결혼을 내팽개치고 이웃집 남자와 왈츠를 추러 떠난다. 아내는 착한 남편을 버린 걸 후회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집을 나선다. 장대한 왈츠가 흐르는 시간만큼은 걱정 없이 몸을 맡기고자 앞날의 불안을 떨쳐낸다. 외도의 대가는 클 테지만 그것이 왈츠가 지닌 매력일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 몸을 흔든다. 영화는 집에 남겨진 남편의 절망을 비춘다. 외면하고 싶은 그의 고통이 화면 바깥까지 베어진다. 난 이 장면을 싫어한다. 그가 혼자 머문 집에는 아무런 곡도 흐르지 않는다. 누가 그의 왈츠를 꺼버린 거지? 왜 남겨진 자를 옥에 가둔 거지. 카메라는 왜 그를 잔인하게 지켜보는 거지. 그를 혼자 내버려 두라고.


 내가 사랑으로 느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 아침 출근길이 권태롭고 베갯잇에 머리를 뉘면서 오늘 하루가 허무할 때 사랑 없이 지냄을 느낀다. 나지막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연인의 뜨거운 몸을 모르고, 그냥 버티듯이 하루를 흘려보냄을 아쉬워한다. '이거 삶에 BGM이 없어서 이렇게 퍽퍽한가.' 퇴근길에 듣던 롱아일랜드재즈밴드의 곡을 다시 켰다. 뉴욕의 어느 재즈바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기분이다. 연주에 몰두한 트럼페터를 바라보며 바에 앉아있다. 시원한 맥주가 더위를 떨치고 바깥바람의 뭉근한 기운에 몸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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