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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Nov 11. 2017

Before sunrise, after sunset

여행과 사랑에 대한 단상
일본, 오카야마 구라시키 미관지구. 같은 곳을 바라보던 두 사람
pt1. Before sunrise

오스트리아 빈으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마주친 제시와 셀린느. 영화 속 두 사람이 처음 나누었던 대화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열차 안에서 시끄럽게 부부싸움을 하던 커플을 보고 동시에 고개를 젓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제시는 셀린느에게 '그들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아나요?'라고 물었고, 셀린느는 독일어를 못한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제시는 셀린느가 읽고 있던 책에 대해 물어봅니다. 마침 그의 손에도 책 한 권이 들려 있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참 이상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빈을 함께 여행하며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눕니다. 영화 내내 펼쳐진 빈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두 시간 내내 쉴 새 없이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 몸짓, 눈빛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영화였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 직전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너는 수년간 만난 커플은 서로 뭘 해야 할지 뻔히 알기 때문에, 매너리즘을 느끼고 서로를 미워하다고 했지. 나는 반대라고 생각해. 누군가를 알아가고 완전히 알게 됐을 때, 정말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가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매일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때 말이야."

단 하루의 우연한 만남. 헤어지기 직전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내는 셀린느의 말들이 우리는 이대로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다짐 같기도 해서 참 설렜던 기억이 납니다.


pt1-2. 영화에 덧붙여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과 여행을 앞둔 여행자의 마음은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낯설어서 두렵고, 행복해서 충만한 감정들이 끊임없이 저울질합니다. 늘 여행을 떠날 때마다 비포 선라이즈의 장면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일본의 덜커덩거리는 전철을 탈 때마다, 또 다른 제시와 셀린느가 있지는 않을까 상상해보기도 하고요.


20대 초반의 제시와 셀린느는 분명 20살의 저와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조용히 관찰하며 사랑에 빠지고, 사랑의 영원성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확고히 믿고 있는 상태. 어떠한 환상적인 꿈들도 허용되며, 내 옆에 앉은 이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했던 시절.




일본 교토, 도후쿠지에서 바라본 전경
pt2. Before sunset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인 비포 선셋을 보게 된 건 한참 뒤였습니다. (영화 속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함께 흐르기 때문에, 비포 선셋은 선라이즈 후 9년 만에 만들어졌습니다.) 두 배우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에서 먼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기억 속의 제시와 셀린느는 빈의 밤거리를 활보하는 활기차고 보송보송한 청년들이었거든요. 하지만 영화 속 두 사람은 너무나 지쳐 보이는 어른이 돼 있었습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하는 대화의 흐름이나 주제 자체도 바뀌었습니다. 환상적인 꿈들에 둘러 싸여 있던 20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미 사랑과 이별, 삶을 지칠 대로 겪은 30대의 두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꿈과 사랑의 순수성을 믿었던 9년 전 자신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만남은 다시 한 번 서로를 강력하게 흔드는 계기가 됩니다. 제시는 이미 가정이 있음에도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셀린느는 늘 상처만 주고 떠나가 버리는 단편적인 관계들에 지쳐 있을 시기였습니다.


동틀 녘까지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던 그때 사랑의 시간들은 이미 지나가고, 이제는 저녁노을까지 고작 반나절의 시간 밖엔 남아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저녁노을처럼 빠르게 저물어 버리고 말까요?


pt2-2. 영화에 덧붙여

여행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중반이 넘어가면 슬슬 지루해지거나 비슷한 것들이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피곤하다는 이유로 눈앞에 있는 것들을 놓쳐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이미 끝난 관계들에 미움과 불평을 쏟아붓곤 합니다. 그때 그 사람이 잘못해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가정을 곁들여 미련을 못 버린 아이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처음 그 순간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사람과 함께함으로써 느꼈던 감정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런 것들은 모두 소멸해 버린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지루해지고, 어느 순간 사랑은 끝나버립니다.


두 배우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담은 비포 선라이즈도 좋지만, 그래도 마음이 더 쓰이는 영화는 비포 선셋입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자연스레 깃든 주름처럼, 대화도 더 깊어지고 솔직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환상성을 품은 20대의 셀린느와 제시는 사라졌습니다. 두 사람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그 속에서 상처받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그들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일본 교토, 해가 진 후 기온 거리
pt3. after sunset

오늘은 여행이 끝난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때의 기억을 붙잡으려 여행의 순간들이 날아가 버리지 않게 꽉 붙잡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을 날아가는 풍등이나 색색깔의 풍선처럼 언젠가는 이것들을 모두 놓고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라서,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찌꺼기 같은 미련이나 감정들을 모두 내려놓고 싶습니다. 노을이 지면 붉은빛이 모두 사라지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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