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도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졸업식 다음 날 바로 출근. 주 5일.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근. 퇴근 시간 30분 전이면 쓸데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선배가 갈 생각이 없어 보이면 그제야 설레는 마음을 접었던 막내. 학교에선 은근히 할 말 다 하고 다녔던 제가, 회사만 가면 그렇게 소심하고 연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여를 다니다 퇴사! 저는 훌쩍 여행을 떠났습니다.
2017.10.11~14
일본 교토 (립톤 카페, 모안 카페, 이름 모를 팬케이크 전문점)
이야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조금씩 사라지는 케이크 조각들.
걱정 한 스푼, 오지랖 조금과 신세 한탄 한 스푼, 시시콜콜 연애와 이별 이야기 한 스푼. 과자 부스러기처럼 조각조각 흩어지는 이야기 한 스푼을 넣으면 대화가 완성됩니다. 우리의 이야기들을 조물조물 섞어 꿀꺽 먹어 치우는 달콤한 케이크.
문득 당신과 이야기를 하다, 케이크가 우리의 이야기를 먹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퇴사 후, 당연한 소리지만 '백수'가 되었습니다. 다 잊고 새로 시작하자는 의미의 여행이었지만, 친구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취업, 미래, 직장'이라는 주제들이 다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누구는 대기업에 취직했다더라, 누구는 공무원 시험에 준비 중이라더라..
타이베이의 분위기 좋은 카페 '필름 하우스'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동기 B, C와 마시게 됐던 날.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취업'이라는 중대사에 어쩐지 친구들이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다 비우고 싶어 떠나게 된 여행인데,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되나.
차 한잔을 의미 없이 젓다가, 문득 조용해진 것 같아 고개를 들었습니다. 입꼬리를 슥 올려서 셀카를 찍고 있는 B와 C.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스르륵 풀려서, 또 바보 같이 웃었습니다. 그래, 지금이 중요하지. 우리가 중요하지.
저는 달콤한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떠먹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을 땐 마냥 기쁘기만 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자기소개서를 넣고, 몇 번의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후 겨우 붙은 곳. 첫 출근 전날 밤엔, 생일 파티를 앞둔 어린아이처럼 설레서 오랫동안 잠을 뒤척이기도 했습니다.
일 년 동안 많이 울고 웃었고, 눈치가 제법 빨라지고 술도 조금 늘었습니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소중한 인연들을 얻었지만, 반대로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분들 입장에선 어리숙한 막내인 제가 답답했을까요.) 일이 점점 익숙해지고, 기계적으로 자판을 두드리던 평범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내가 죽어 있는 느낌이 들어
저는 소심하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대학교 4년 동안 천천히 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늘 제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이었죠. 대학교 4년의 시간은,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천천히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적성을 알지 못한 채 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한 고등학생처럼
충분한 고민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뛰어든 사회 초년생인 제가, 이 회사에서 어떠한 성취나 보람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 퇴사의 이유를 물어보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조금 더 제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생생히 살아 있는 순간을 느끼고 싶습니다.
혹시 당신도 카페 가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다음에는 당신과 함께 조용한 카페에 들러 커피 두 잔과 케이크 한 개를 시켜 놓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제 이야기를 케이크가 모두 먹어 치울 그 순간까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