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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병규 Jan 02. 2022

여행의 계획

여행 계획에도 여백은 필요하다.


떠나고 싶다면 계획하라!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시작은 계획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멋진 여행이 될 수도 있지만 무작정 떠난 여행에는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과 불편함이 있다. 아마도 무작정 떠난다 하더라도 여행지 내내 핸드폰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를 검색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스마트 폰이 없었던 시절이라면 무작정 떠나 보는 여행도 멋지다고 말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정보가 없다면 핸드폰으로 검색부터 하는 시대에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라니. 어불성설이다. 때문에 여행을 시작하려면 계획을 해야 한다는 게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그러나 여행의 계획할 때 치밀하고 효율적이며 촘촘한 계획을 짜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허술하고 엉성하며 허점투성이의 계획을 짜는 것을 추천한다. 철저하게 계획된 여행은 그 계획이 어긋날 확률이 높으며 계획이 틀어질수록받는 스트레스는 여행을 망치기 때문이다. 주로 1박 2일 여행을 다니는 나에게 어릴 적 여름방학 계획표처럼 빼곡히 채워진 여행 계획은 매시간 시간표대로 하기 위해서  서두르기 급급했다. 지난가을 곰배령 여행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산악회 4명과 함께 한 곰배령 여행 계획은 이러했다.


1일 차


오전 7시 사울을 출발

오전 10시 곰배령 도착 후 산행 시작

오후 12시 하산  

오후 1시 캠핑장 도착  및 텐트 피칭

오후 2시 점심 식사 및 자유시간

오후 5시 불멍 시작 및 저녁식사 준비

오후 11시 취침


2일 차


오전 7시 기상

오전 8시 아침 식사 및 짐 정리

오전 11시 캠핑장 철수

오후 12시 인제 자작나무 숲 도착 및 산행 시작

오후 3시 하산 및 늦은 점심 식사 장소 이동

오후 4시 서울로 출발



네이버 지도를 보면서 불필요한 동선을 체크하고 이동시간을 고려해서 여행 계획을 구성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시작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운전한 1호 차량은 무사히 10시 도착했으나 2호 차량은 길을 잘못 들어 11시 넘어서 도착한 것이다. 다행히도 곰배령 에 입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곰배령에서도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강원도의 쌀쌀한 날씨였다. 아침 겸 점심으로 곰배령 정상에서 간단하게 도시락을 먹을 생각이었으나 곰배령 정상은 소백산의 날카로운 칼바람만큼 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산 중턱에서 바람을 피해 내가 만들어 가지고 간 주먹밥과 일행의 김밥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어가며 먹어야 했다. 아무도 탈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캠핑장에 도착해서도 사건은 터졌다. 텐트 피칭을 끝내고 밥 먹을 준비는 하는 도중 삼겹살을 굽기 위한 솥뚜껑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다. 그 와중에 일행 중 한 명은 핸드폰을 분실했다. 나는 밥 준비를 하다 말고 핸드폰을 분실한 일행과 나의 1호 차량을 타고 다시 곰배령으로 달렸지만 결국 핸드폰은 찾지 못했다. 캠핑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솥뚜껑 대신 스테인리스 찜기 물통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추억일 수도 있으나 하루 종일 어그러지는 계획에 스트레스는 나를 집어삼켰고 이런 강행군을 여행이라 부르기 힘들게 했다. 힘들게 삼겹살을 구워 먹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불멍을 하려고 장작불을 지펴놓았으나 곰배령의 칼바람은 캠핑장까지 따라왔다. 장작불을 버려두고 나의 쉘터로 도망치듯 자리를 옮겼다. 나에게는 그날의 일들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고 떠들며 놀았다는 것이 더 신기하다.



만약 저리 촘촘하게 계획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다급함은 없었을 것이고 여유로웠다면 그때그때의 상황을 즐겼을 것이다. 춥지만 배고프니 먹었을 것이고 그렇게 먹는 밥은 더없이 맛있었을 것이다. 또한 시간이 늦었다는 생각이 날 짓누르지 않았을 테고 나는 멋진 가을의 곰배령을, 겨울로 향해 달리는 가을의 캠핑장 풍경을 즐겼을 것이다. 나를 지치게 만든 것은 바로 계획 되로 될 것이라 생각한 나의 오만함이었던 것이다.


 이 이후로 나는 여행 계획을  단어로 계획한다. 예를 들면 1월 여행은 속초와 양미리 그리고 눈 , 책방이다.

위 4가지 단어를 가만히 보면 디테일한 계획이 떠오르는 것이다. 다만 지난번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저 첫째 날에는 눈을 보기 위해서 속초 가는 길목에 있는 눈이 내린 인제 자작나무 숲을 갈 것이고 자작나무 숲을 다녀와서는 속초 동명항에 들러 시리도록 푸른 겨울바다와 함께 연탄불에 구운 양미리를 호호 불어가며 먹을 것이다. 캠핑장에서는 나의 예쁜 텐트에서 간단하게 준비한 음식으로 느긋한 저녁시간을 즐기고 잠들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다면 속초의 중앙시장에서 아침밥을 먹고 어느 예쁜 카페의 첫 손님을 해볼 생각이다. 만약 늦게 일어났다면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느긋이 속초 시내의 예쁜 책방에서 커피와 함께 독서를 할 것이다.


단어로 된 계획은 여백이 있다. 여행의 여백은 내가 채우면 된다. 어떤 것으로 채우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편안하게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면 된다. 거창한 것은 필요 없다. 우리는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속초에 꼭 가봐야 할 곳, 혹은 속초에 가면 꼭 가봐야 할 맛집. 등을 검색하고 무의식적으로 이런 곳을 가지 않으면 여행은 실패 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게 된다. 또한 되도록이면 내가 가진 시간 안에 더 많은 곳을 가려고 노력한다. 1박 2일 동안 혹은 2박 3일 동안 여행지의 필수코스 혹은 맛집들을 다 안 가보면 어떠한가. 다음에 또 가보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다음 주, 다음 달 에도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강릉에 여행 왔다고 해서 다음에는 강릉에 또다시 안 올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또다시 강릉을 찾을 것이고 그때 못 가본 곳을 가보면 된다. 한 번에 많은 곳을 가다 보면 내가 온전히 가져가야 할 여행의 충만함을 가지지 못한 채 집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한 곳을 가더라도 온전히 그곳의 매력을 느끼고 와보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12월 홀로 떠난 강릉 여행지 중 고래 책방에서 느꼈던 따뜻한 햇살과 그때 읽었던 책처럼 아마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한다.


 ‘tv나 잡지에 나오는 곳을 찾아가는 산책은 산책이 아니다.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 라고나 할까.’ [우연한 산보]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 다. 여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어떤 여행지 이든 필수코스는 필수가 아니다. 이상적인 여행은 ‘태평한 미아’처럼 발길 닿는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나만의 느낌, 과 감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태평한 미아 에게도 성공과 실패 가 공존하고 있지만 성공도 나에게는 좋은 추억이고 실패도 뒤돌아 보면 “그땐 그랬어!” 라며 술자리의 안주 한토막이 될 수 있다.


 12월의 여행에 이어 1월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나는 천하태평이다. 이미 계획을 다 했기 때문이다.  1월의 여행은

[속초, 양미리, 눈 구경, 책방]이다. 나의 여백 많은 여행 계획에 동참해줄 사람이 몇이 될지는 모르겠다. 4명이 될 수도 있고 지난번처럼 또 혼자 떠날 수도 있다. 여럿이 함께면 여럿 인대로 혼자면 혼자 인대로 천천히 그리고 느긋이 즐기면 된다. 나의 여행은 여백을 채우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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