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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Mar 09. 2021

맥적 이야기

노 셰프 프로젝트 이야기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누군가가 칭찬해주면 그게 무척 즐거워서 자주    있을까 찾아내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레시피를 찾는 방법은 주로 엄마의 잡지였다. 중학생 때인가 처음으로 오징어 덮밥을 만들었을 때는 집에 언니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칭찬을 받았다. 쑥스러우면서도 무척이나 뿌듯하던 기억이 난다.  후로 조금씩  어려운 요리로 발전해 갔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도 음식을 하는 것을 좋아했고,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는 룸메이트들과 돈을 아껴 사며 마트에서 장을  요리를 하는 것을 즐겨했다. 룸메이트들이 요리에 관심이 없어 주로 맡아하면서 칭찬을 들으면 고래처럼 춤을 추며 요리를 했다.

내 딴에는 대충 해도 맛이 괜찮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약간의 자만심도 있었는데, 사실 예전에는 회사를 그만두면 심야식당처럼 작은 식당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한 적이 있었다. 인정한다 자만했다는 것을. 그런 나에게 요리를 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일이 있었으니, 이름도 그럴듯한 노 셰프 프로젝트다.







no chef project 노 셰프 프로젝트는 셰프가 아닌 사람이 1일 셰프가 되어보는 것으로, 아는 홍보 대행사 대표님이 운영하는 와인바에서 이벤트성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였다. 의사, 잡지사의 에디터, 회사의 대표, 작가 등등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노 셰프로 거쳐갔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에이, 내가 어떻게란 생각을 했지만 곧 해보고 싶다는 쪽으로 옮겨갔다. 2015년 가을이었으니 벌써 5년도 훌쩍 넘은 얘기다.



덜컥한다고 한 이후부터는 불안한 마음이 컸다. 집에 친구를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는 일이었다. 손님은 거의 지인이었지만 (물론 내 지인뿐 아니라 지인의 지인도 있었다.) 그들이 돈을 지불하면서 먹는 것은 매우 대단하고 큰 일이었다. 이런 생각이 든 순간부터 부담감이 몸집을 키워갔다. 아무리 1일 셰프라지만, 돈이 아까운 요리를 만들 수는 없다는 불안감과 부담감. 프로가 아니지만 프로가 되어야 하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메뉴를 정하는 것. 당시에는 한식 조리가 더 자신 있기도 했지만, 내 앞의 두 분은 모두 양식을 하셨어서 다양성을 위해 나는 한식을 해보고 싶었다. 먼저 와인바이기 때문에 와인과 페어링이 잘 맞는 한식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는데, 오픈 시간을 고려해 저녁식사로도 가능한 음식이어야 했다. 메인 메뉴로는 고기 요리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먼저 생각했는데 원가가 문제였다. 나에게 주어진 재료비와 메뉴의 금액에 따라 고민에 고민을 했는데, 메뉴는 식당의 간판과 같았으니 가장 크고 대단한 고민거리였다.



고민에 고민을 더한 끝에 결정한 메뉴는 맥적, 모둠전, 오리엔탈 샐러드 누들이었다. 맥적은 고기가 메인이되 재료비를 위해 돼지고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며 생각해 낸 것이고, 육전/배추전/굴전으로 이뤄진 모둠전은 와인과 페어링이 좋은 한식 중 하나라 제일 먼저 생각한 메뉴였다. 둘 다 고기에 기름진 메뉴라 조금 상큼한 것을 곁들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더한 것이 오리엔탈 샐러드 누들이다.

자 이제 메뉴는 결정이 됐다. 제일 큰 산을 넘은 것처럼 한결 마음이 나아졌다. 이제는 레시피 정립이다. 평소에 대충 하는 것이 아닌 정확한 재료, 계량, 디스플레이를 결정해야 한다.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음식을 만들어하되, 원가를 초과하면 안 되기에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내 마음대로 장을 보고 재료 아끼지 않고 팍팍 만들던 때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식당들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을 할까, 연민의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결정된 메뉴들




이벤트를 하기로 결정 후 당일까지는 약 한 달여의 시간이 있었다. 한 달이란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을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메뉴 결정과 실습도 해야 했고, 사진 촬영과 홍보용 질문지를 쓰기도 해야 했다. 페이스북의 노 셰프 프로젝트 페이지를 통해 나가는 것이었는데, 생각할 것도 많고 긴장도 되었다. 게다가 예약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특성상 워크인 손님이 많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예약제로 진행이 되는데 예약이 없으면 어쩌지.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불안감과 부담감이 점점 높아져간 시간이었다. 요리만도 걱정인데 모객까지도 책임감이 느껴지니 이렇게 머리가 아플 수가 없었다. 나살려!

인맥이 넓은 언니에게 SOS를 쳤다. 언니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부탁을 해 몇 테이블을 채워주었다. 예약이 다 차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무한 실습이다! 아무리 자주 해 먹던 음식이래도 파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여러 번 테스트를 하면서 가장 최상의 레시피로 정립을 해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단시간 동안에 가장 여러 번 같은 음식을 만들었던 시간이었을 거다. 요식업계 종사자 말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흥미롭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행사의 날이 되었다. 전날은 재료를 사느라 마트를 4군데나 들러야 했다. 찾는 재료가 없어 큰 마트부터 동네 작은 마트까지 골고루 들렀다. 그리고는 재료 준비를 하느라 하루를 꼬박 다 써야 했다. 맥적용 돼지고기는 망치로 두드리고, 양념장은 만들어두고, 누들에 들어가는 새우 껍질을 다 벗기고 주꾸미도, 채소 들고 하나씩 손질을 했다. 재료 준비에 정말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혹시라도 음식을 먹은 사람이 탈이 나는 일이 생길까 무서워 청결에도 만전을 기했다. 목욕재계를 하고 머리를 단정히 묶고 마스크와 니트릴 장갑까지 끼고는 재료 손질에 나섰다. 주방, 재료에 모두 신경을 쓰고 재료를 모두 준비한 것이 새벽에서야 끝이 났다. 살면서 이렇게 요리를 하면서 조심해 본 적이 있던가, 단연코 그전까지는 없었다.






드디어 마스터 셰프 코리아 아, 아니 노 셰프 프로젝트 이벤트 당일이 왔다.(마음은 마셰코 저리 가라였다) 산다고 샀는데도 또 잊은 재료가 있어 마트에 한 번 더 들르고 당일 낮 와인바의 주방에 입성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고 손발이 맞던 가방 디자이너 친구에게 어시스턴트를 부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친구가 장염으로 몸이 아팠다. 그럼에도 당일 취소를 하지 못해 아픈 몸을 이끌고 와주었는데 미안하면서도 들어가 쉬라고 말하지 못했다. 당시 그 친구가 없었다면 굉장히 아찔한 상황이었기에 괜찮다는 말만 믿고 진행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그날의 영업.



곧 저녁이 되고 예약한 시간이 되어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고, 주방으로 오더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 2시간여는 휘몰아치는 주문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호떡집에 불났다는 표현이 딱이었을 것이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다시 나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쌓여가는 주문에 얼이 빠져 소처럼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그렇게 1차 위기가 끝나갔다. 서빙된 음식들을 먹는 시간이 되자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약간의 쉴 틈이 생긴 후부터는 추가 주문으로 이어졌는데 그제야 침착하게 능숙한 척 차례대로 들어온 음식을 요리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시간이 날 때마다 홀을 흘끔 쳐다보며 음식의 반응을 살필 수 있던 것도 이때였다.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은 각자의 이야기에 빠져있기에 음식에 대한 반응은 바로 얻을 수 없었지만, 서빙하는 직원들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추가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주문들을 요리하던 그때쯤이었다. 홀에는 흥겨운 재즈가 흐르고 사람들은 웃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음식을 만들고 있던 그때. 아 요리를 한다는 건 즐거움은 이런거구나, 라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툭 치듯 다가왔다. 아마도 이런 희열에 요리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


이후 준비한 재료가 다 소진되는 2차 위기가 몰려왔다. 급히 스탭을 마트로 보내 공수해온 재료로 어찌어찌 그날의 이벤트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정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그날을 끝마쳤다.


그렇게 꽤 컸던 행사를 마친 후 나는 넉다운이 되어 하루 정도 앓고 며칠 후에 체력을 회복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하루의 이벤트였지만 매일 주방에서 일하는 셰프들이 왜 체력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너무나 이해가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식당에 대한 꿈을 접었다. 재료비와 인건비 만으로도 만만치 않다 생각했는데, 거기에 임대료와 각종 세금, 관리비를 생각하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운이 좋아 내가 하는 음식을 먹으러 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생각만 해도 무섭고 슬픈 일이었다. 음식 좀 한다고 함부로 뛰어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아 이건 안 되겠다. 나는 탄식하면서 언젠가 생겼을지 모를 내 미래의 심야식당을 접었다. 이후로 노 셰프 프로젝트는 절대 식당 할 생각하지 말라 경고하는 체험 프로그램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진담이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종종 그 밤이 생각난다. 주방에서 바쁘게 음식을 만들던 그때 재즈음악에 섞여 들려오던 웃음소리,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 그때의 공기, 기분은 말도 못 하게 짜릿하고 행복했다.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할 정도로.


그래 죽기 전에 다시 해보고 싶은 일이 몇 가지는 있는 것도 멋지지. 나는 꿈이라도 꿔보기로 했다. 언젠가 하루만이더라도 음식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도록 도전해 보겠다고. 노 셰프 프로젝트처럼 좋은 기회를 꼭 한번은 만들어 보겠다고. 그때는 더 능숙한 척, 차분한 척 잘할 수 있을 것이고, 주방에서 나는 다시 한번 행복할 것이다.






노셰프 프로젝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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