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집의 추억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 기억이 선명해진다는 어느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고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란 적이 있다. 기억력이 없는 편은 아닌데 점점 희미해진다. 기억이란 건 나이테처럼 선명하게 새겨지는 거라 생각했는데 점점 새롭게 들어오는 기억들에 하나둘씩 밀려가는 건가 보다. 나는 미련이 많은 성격이라 아쉬워하며 구태여 붙잡아두려 사진첩이나 나누었던 대화, SNS를 들추다가 바쁜 생활에 밀려 그것조차 하지 않게 된 것이 몇 년이 지났다. 바쁜 일상에 쫓기듯 사는 건 드라마에서나 보던 건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 있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분명 내가 겪었던 일임에도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처럼 가물가물해진다. 그냥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잊히는 것이 아쉽기도 슬프기도 한 장면들이 조금 있다. 그중에 하나는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온 겨울 방학이다.
엄마는 딸이 넷, 아들이 셋인 집안의 둘째 딸이었다. 위로 큰 이모, 아래로 셋째, 넷째 이모에 삼촌들이 셋이 있었다. 삼촌들은 엄마와 나이 차이가 좀 났기 때문에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모두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멀리 떨어져 산 데다 각자의 청춘이 바쁘던 시기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우리가 어릴 때 네 자매는 방학 때마다 돌아가면서 서로의 집에 모여서 놀곤 했는데 그때를 기억하면 참 좋았다. 더 이상 엄마를 따라다니지 않는 나이의 큰 이모네 언니들을 제외하고 모이는 사촌들은 모두 또래였어서 온갖 게임과 놀이를 함께 했었다. 낮에는 밖을 뛰어놀다 밤에는 집에서 부루마블이나 전기 게임 (원을 그리고 앉아 이불속으로 손을 잡고 누가 먼저 찌릿했나를 가려내는, 지금의 마피아보다 단순하면서도 비슷한 게임이었다) 같은 것을 하면서 놀곤 했다. 밤에는 잠자기 아쉬워하면서도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지는, 걱정이라고는 우리 언니가 나보다 내 사촌동생들을 더 챙기는 것 같은 사소한 질투심 정도였던 안온했던 어린 날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나와 동생, 나이가 같았던 사촌, 동생과 나이가 같았던 사촌 여동생 넷이 외할머니댁에 가게 되었다. 함께 놀던 언니와 오빠가 중학생이 되면서 방학 모임이 줄어들었던 때였다. 외할머니는 지금은 광주가 된 전라남도 장성 비아라는 곳에 살고 계셨는데, 마침 아빠가 그곳에 출장을 가실 일이 있어서 우리를 차에 태워 가셨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전화하면 큰 소리로 “오야”라며 받아주셨는데, 돌아가신 지금도 그 목소리가 가끔 생각이 난다. 손자 손녀들을 귀여워하며 반가워하던 특유의 억양으로 우리를 환대해 주신 할머니.
또 멀리 살아 자주 보지 못하는 사위가 일 때문에 근처에 들를 때면 늘 아빠가 좋아하는 겉절이를 담가서 밥을 해주셨다. 잠깐이라도 반찬이 많지 않아도 본인이 차려준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보내야 마음 편해하는 분이었고, 그런 정서가 당연하던 때였다.
그해 겨울 우리는 아빠를 따라나섰다가 더 놀고 싶다며 외할머니 댁에서 한 달을 보냈다. 할머니는 그때 부업 같은 소일거리를 하셔서 우리가 일어나기 전 아침에 밥상을 차려두시고 나가셨다. 일어나면 머리맡에 작은 밥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고봉밥에 구운 김, 아빠를 위해 담갔던 겉절이, 계란 후라이가 밥과 마찬가지로 산처럼 쌓여있었다. 예정 없이 한 달이나 맡게 된 손자 손녀들 반찬을 고민하던 할머니에게 우리가 잘 먹은 계란 후라이는 만능 반찬이었던 건지, 아침이면 거의 계란 한 판은 족히 될 것 같은 계란 후라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이들의 기호에 따라 노른자를 바싹 익히기도 하고 살짝 익히기도 했다. 식용유를 가득 붓고 맛소금을 살살 뿌려낸 계란 후라이는 거의 한 달 내내 먹었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분명 집이었다면 엄마에게 다른 반찬을 해달라고 졸랐을 텐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불평 없이 매일 그것들을 먹어댔다.
아침마다 바쁘게 그것을 부쳐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찡해온다. 그때는 그런 것도 없이 배고픈 제비 새끼들처럼 그저 맛있다고 냠냠 잘 먹어댔지만 말이다.
집에서 매일 뚫어져라 보던 케이블 채널도, 게임기도 없던 적막한 시골집이었지만 우리들은 심심할 틈도 없이 바쁘게 놀았다. 앞마당에서 뛰어놀다 외삼촌 방에 있던 카드를 가지고 원카드 같은 것을 하기도 했고, 공기놀이도 매일 지겹게 했다. 그즈음 사춘기였던 나는 가끔씩 삼촌 방에 혼자 앉아 시집을 읽거나 사색을 하기도 했고, 이승환이니 공일오비, 이오공감을 들으며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부치기도 했다.
밤이 되면 할머니가 주신 군고구마나 군밤 같은 주전부리를 먹으며 티브이를 보고, 곯아떨어진 할머니 옆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명작 영화 같은 것을 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나 낭만적인 유년시절의 장면들이었다.
그때 형제 중 유일하게 할머니와 살던 막내 삼촌은 아마도 마지막 방위였던 것 같은데, 노느라 밤늦게나 집에 들어와 가끔씩 우리와 놀아주었다. 어느 날은 술이 취해 들어와 자는 조카들 이마에 뽀뽀를 해대며 깨워서 조카들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할머니에게 얼른 잠이나 자라고 혼나기도 했다.
외할머니 집 앞에는 큰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바람이 불면 휘이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낮에도 어딘가 음산해서 오래 그곳을 보고 있으면 괜히 오싹해지곤 했는데 밤이면 바람소리가 더 커졌다. 외삼촌은 함께 자려고 누운 우리에게 대나무 숲과 얽힌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서 해주었고, 그럴 때면 무서워하던 사촌은 소리 질러 할머니에게 일러대고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 나는 꺅꺅대며 웃어댔다. 무서워하면서도 동시에 그곳을 좋아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그곳을 들여다보곤 했다. 대나무 숲에 누군가가 있을 때도 있었는데 어릴 때 했던 상상력이었는지 실제 일어났던 일의 기억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펑펑 내린 눈으로 바깥이 무척 하얗게 되어 있었다. 눈을 봄과 동시에 함성을 지르며 신나서 뛰어나갔다. 할머니는 헛간에 있는 비료포대를 하나씩 꺼내 주었다. 집 앞 대나무 숲 옆으로 난 길은 경사가 지어있어서 그대로 비료포대를 타고 눈썰매를 탈 수 있었다. 길지 않은 길이었지만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면서
신나게 눈썰매를 탔었다. 눈이 와서 집에 계셨던 할머니는 그날도 계란 후라이 한 판을 부쳐 주셨고, 썰매를 타다 밥 먹으란 소리 열 번 만에 집에 들어가 밥을 먹어치우곤 다시 또 눈썰매를 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내내 우리는 같은 스케줄을 반복했다. 눈뜨고 일어나 눈썰매를 타고 밥을 먹으며 몸을 녹이곤 다시 눈썰매를 타고. 놀이공원 눈썰매장을 간 것보다 즐겁고 강렬했던 추억이다.
그때의 하얀 눈과 비료포대 눈썰매, 계란후라이는 그 후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을 한 적이 많았을 정도로. 외할머니 집은 내 어릴 적 무수히 많은 추억의 원천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간절하게 할머니댁 툇마루에 앉아있고 싶을 때가 있다.
할머니는 그때 이후로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도 놀러 가면 늘 계란 후라이를 빼놓지 않으셨다. 아빠가 갈 때면 겉절이를 꼭 해주셨던 것처럼. 동생과 지금도 할머니 집에서의 추억을 나누면 깔깔대면서 이야기하는 게 계란 한 판을 모두 부친 게 아니었을까 의심했던 계란 후라이 얘기다. 그래서 계란 후라이 하면 꼭 할머니와 어린 시절 신나게 놀던 외할머니댁 생각이 난다.
내가 20대 중반을 넘었을 무렵 외할머니의 팔순잔치를 겸해 외가 쪽 가족 전체가 제주로 여행을 다녀왔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지로 가던 중에 버스가 할머니 마을을 한 바퀴 돌았는데 할머니의 동네 앞 우물 자리부터 엄청나게 울었다. 장례를 치르고 무슨 사정이었는지 모르지만 바로 할머니의 집은 철거를 하고 높게 흙으로 덮어버렸는데 매몰된 집터를 보면서 돌아가신 할머니도, 내 오랜 추억의 할머니 집도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아 한참 운 기억이 난다.
드라마 속 삼순이는 전 남자 친구를 잊지 못하는 희진에게 말한다. 추억은 아무 힘이 없다고. 처음에 나는 그 대사에 공감하지 못하다 점점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추억팔이를 하는 나 자신이 건설적이지 못한 것 같고 좀 부끄럽게 여겨질 때가 있던 때가 있었다. 바쁘게 일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의 가치의 전부처럼 생각하던 때였다. 현재와 미래에 좀 더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곤 했었다.
그런데 삼순이의 나이를 훌쩍 또 넘고 보니 이제 그것도 아닌 거 같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때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내 일상은 멈추었고 우리 가족들은 과거의 아빠를 찾아내고 추억하는데 오랜 시간을 썼었다.
여러 가지를 차치하고 봐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들도 결국 다 추억팔이인 것을 보면서 추억에 아무 힘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추억은 나름의 힘이 있으니 굳이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현실에 충실하고 미래를 준비하고, 그러다 가끔은 멈추고 과거를 돌아보고 웃음 짓고 눈물지어도 된다 생각하니 과거에 비해 한결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이제 스스로에게 하는 다정한 충고 같은 것이 된 것 같다.
*epilog.
브런치 글을 쓰면서 음식 사진을 찾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다. 설마 계란후라이 사진은 없겠지 하면서 구글 포토를 찾다가 생각보다 많은 계란 사진을 발견하고 놀랐다.
*표준어로 계란 프라이가 맞으나, 할머니가 쓰시던 발음을 생각해서 계란 후라이로 표기했으니 이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