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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Feb 15. 2022

동태전 이야기

꼬맹이의 외출





벌써 7년여 전의 일이다. 우리 집에 꼬마 손님이 오게 되었다. 봉사활동을 다니던 한사랑 장애 영아원에서 친해진 한 아이의 외출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영아원의 아이들은 보통 가정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단위의 신청자를 위주로 이루어지는데, 그 당시 내가 예뻐하던 꼬맹이를 데리고 이곳저곳 가보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께 혹시 가능할까 얘기를 해두었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영아원 방침상 외출의 조건은 까다로운데, 봉사활동 기간이나 아이와의 유대관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결정이 된다. 봉사활동을 한 지는 꽤 시간이 되어 시간이나 아이와의 유대관계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미혼인 나에게는 쉽게 허락이 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운 좋게도 오래 봉사활동을 해 온 언니가 영아원과 특별한 인연도 있던 덕분에 외출의 허락이 내려졌다. 당시 만 3세가 조금 넘었던, 얌전하지만 친해진 사람에게만 활달한 모습을 보이던 귀여운 나의 꼬맹이와의 외출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꼬맹이를 만난 건 그 당시로부터 약 2년 전이었던 것 같다. 한사랑 장애 영아원은 중증 장애를 비롯해 경증 장애 아동들이 있는 시설이었는데, 1층의 중증 장애아들이 한 개의 반을, 2층에 경증 장애아들이 네 개의 반을 이루고 있었다. 자주 봉사활동을 가는 언니와 함께 가다 보니 50여 명이 되는 아이들과 금세 얼굴과 이름이 익고 정이 들었다. 그곳에서 많은 꼬마 아이들을 만났다. 누워있는 갖난 아이부터 뛰어다니는 꼬맹이들까지. 한사랑은 가봤던 시설 중에서 환경이나 분위기가 좋은 곳이었다. 선생님들도 밝고 따뜻하셔서 이야기를 나누면 아이들을 예뻐하고 아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늘 기분이 좋았다. 당시 좀 힘든 일이 있었는데 아이들과 놀이방에서 뛰어놀다 보면 고민이나 힘들었던 것들이 싹 잊히곤 했다. 신기하고 소중한 경험이 되어주고 내게 치유 능력을 발휘한 곳이었다.



영아원에서 처음 만났던 꼬맹이는 경증 장애에 다소 발달이 느려서 또래보다 말을 잘하지 못했다. 놀이방에서 아이들과 놀기 시작하면 여러 아이들이 달려들어서 함께 놀곤 하는데, 늘 한 구석에서 떨어져서 쳐다보고 있어서 더 기억에 남았다. 처음에는 옆에 가서 말을 걸어도 멀뚱히 쳐다볼 뿐 특별히 나를 따르는 느낌이 없었는데, 어느새인가 찾아가 이름을 부르면 방긋 웃어주기 시작했다. 표정이 별로 없던 아이라 더 특별하고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친해지고 나서부터는 영아원에 가면 내내 손을 잡고 다닐 정도로 애착을 보여주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을 잡을 때,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보면서 방긋방긋 웃을 때, 아이와의 관계는 그럴 때 특별해진 것 같았다. 마치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님의 시처럼.   



꼬맹이의 첫 외출일은 추석 연휴였다. 쉽게 성사될 거라 생각지 못한 일이 허가가 떨어지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조금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언니와 아이의 옷을 사고 귀여운 머리띠와 머리끈, 장난감 등을 잔뜩 사고 기다렸다. 마치 소풍을 가는 듯 설레었다.

연휴 첫날 아침,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사랑 장애 영아원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이모네 집에 간다며 들떠 있었다는 아이는 자기 몸만큼 커다란 트렁크에 외출용품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도착하니 아이는 새로운 환경을 낯설어했다. 생전 처음 보는 강아지를 보고 겁을 먹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좋아하는 뽀로로를 보고 낮잠에 들어서 그 사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추석이라 간단하게 잡채와   가지를 준비했다. 나는 명절에 집에 가지 않아도 명절 음식을 혼자  챙겨 먹는 사람이라 꼬맹이에게도 그런 명절의 기억을 주고 싶었다.  번도 가정의 명절을 경험하지 못했던 아이라 나름 여러 가지를 체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다. 앞으로 되도록이면 명절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이후로 꼬맹이 4번의 명절을 함께 보냈었다.



그날 저녁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꼬맹이는 작고 마른 편이었는데 어른 밥공기만큼 밥을 먹고 잡채와 전을 잔뜩 먹었다. 그중에 제일 좋아했던 것은 동태전이었다. 혼자 너무 잘 먹어서 혹시라도 가시가 있을까 봐 잘게 자르려도 해도 혼자 하나를 꼭 입에 넣으려고 해서 걱정이 되었다. 금방 다 먹어서 다시 몇 개를 부쳐주니 잘 받아먹었다. 나중에는 배탈이 날까 무서울 정도였다. 꼬맹이는 항상 밥을 잘 먹었는데 그럼에도 마른 편이라 늘 마음이 쓰였다. 그해의 추석은 부모님 집에 가서 같이 보내고 꼬맹이는 다시 복귀를 했다.



이후로 한 달마다 외출을 나오면서 두세 달이 지날 무렵 꼬맹이는 우리 집 강아지였던 초코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초코 산책을 할 때는 줄을 잡겠다고 하고 함께 뛰었다. 집에 오는 것도 익숙해졌다. 외출을 나오면 키즈카페나 놀이동산에 가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을 말하며 친척집에 오는 것처럼 조금 편안해졌다. 꼬맹이가 커가면서 기댈 수 있는 친척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2년이 조금 넘게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꼬맹이의 외출은 계속되었다. 우리 집으로 외출을 하기도 했고, 한사랑 영아원 행사에서 가족으로 함께 참여하기도 하고, 내 친구들과 한사랑 친구들 몇 명을 데리고 펜션 여행을 가기도 했다. 차곡차곡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갔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 날, 기적 같은 꼬맹이의 입양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 입양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장애 영아원 특성상 입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에 기대도 하지 않던 일이었다. 언니의 소개로 함께 봉사활동을 시작한 한 가족에게로 꼬맹이는 입양이 결정되었다. 항상 주양육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기에 너무나 잘 된 일이었다. 꼬맹이와 그 후로 한 번을 만났는데 가족이 생긴 것에 기뻐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여서 마냥 좋아하지만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 후로는 아이 엄마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꼬맹이의 소식을 엿보게 되었다.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는 모습에 혼자 흐뭇하게 웃고 보니 어느새 아이가 올해 10살이 되었다.






그러다 꼬맹이를 다시 만난 것은 작년이었다. 리온 서재에서 북 토크를 할 때 마침 서울에 치료를 온 아이 엄마가 꼬맹이와 함께 왔다. 9살이 된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림책을 보는 꼬맹이에게 마침 친한 작가 언니가 그려준 나와 꼬맹이의 그림을 보여주니 이게 정말 자기냐며 몇 번이나 물어보며 호기심을 보여왔다. 예전처럼 불안해하거나 반가워하는 모습이 아닌 모르는 어른을 대하는 많이 큰 아이의 모습은 새로우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진짜 가족들과 이제 정말 안정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아서.


꼬맹이와 많은 날들을 보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명절이다. 명절에 친척집처럼 갈 수 있는 곳이 있기를, 그런 기억이 되기를 바랐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영아원의 봉사활동을 못 간 지 2년이 넘어간다. 아이들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올해 안에는 꼭 만나러 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꼬맹이에게도 다시 친절한 이모가 될 기회가 생기기기를 바라본다.


나의 꼬맹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친한 작가님이 그려준 꼬맹이와 나



강아지 초코와 산책을 하던 5살의 꼬맹이



요즘에도 명절에 전을 부칠 때면 꼬맹이 생각이 종종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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