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1)

by Outis

[私が感じていた刺を君にも同じように与えていたのかもしれなかった(내가 느끼고 있었던 가시를 당신에게도 똑같이 주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何に心を痛めて何に怯えていたのか(무엇에 마음 아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 후타리노 신지츠니 무키아우 코토가 코와캇타(두 사람의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어)...”


탁탁탁탁. 박자에 맞추어 샤프가 책상을 두드렸다.


“This love is thrill, shock, suspense(이 사랑은 스릴, 쇼크, 서스펜스)!... 풉.”


평소처럼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버렸다. 나는 웃음이 터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또르르. 손에서 떨어진 샤프가 교과서 책장의 완만한 곡선을 타고 굴러갔다.


“아 정말, 미친놈들...”


집중이 잘 안 된다. 다음 주에 시험인데 아직 긴장이 덜 되었나. 이제 그만 공부하자 스스로를 다그친 그때였다.


“... 이럼 안되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잠그고,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어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둔 물건을 꺼냈다. 오래된 신문지로 둘둘 말려 있는 그것은 4년 전 그날의 과도. 그새 날에 난 갈색 녹이 또 늘어 있었다.


[둔해졌네. 마치 너처럼.]


나는 과도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잊지 마.]


“잊지 않았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 것. 거리를 유지할 것.


“사람은 누구나 칼을 숨기고 있으니까.”





오늘은 가창 시험이 있는 날이다.


“다음, 28번.”


같은 곡을 27번 듣고 나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곡은 ‘헨델’의 “울게 하소서”. 피아노 전주가 시작되었고, 나는 눈을 감았다.


“Lascia ch´io pianga la dura sorte(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피아노 선율에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섞여 들었다. 나는 자꾸만 가스가 차는 것처럼 불편한 가슴을 억누르며 노래를 계속했다.


“E che sospiri la liberta(자유를 그리며 한숨짓도록 두소서).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한숨짓도록 두소서, 한숨짓도록 두소서, 자유를 그리며)!

Lascia ch´io pianga la dura sorte(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a(자유를 그리며 한숨짓도록 두소서).”


가창 시험은 1절까지. 다행히 큰 실수 없이 무사히 끝냈다.

눈을 떠보니 반아이들이 놀란 눈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기대하며 나는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은 의외였다.


“혹시 이어서 계속할 수 있니?”


“예..?”


“2절 가사 외우고 있냐고.”


... 네.”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아노 간주가 시작되었다.


“뭐야? 더 시키려나 봐.”


“이런 거 처음 아냐?”


“가산점인가, 그럼?”


웅성웅성웅성. 나는 다시 눈을 감고 피아노 소리에만 집중하려 애쓰며 박자를 셌다.


“I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고통이 나를 불쌍히 여겨),

De´miei martiri sol per pieta(나의 괴로움의 사슬을 끊어주길).

De´miei martiri sol per pieta(나의 괴로움, 나를 불쌍히 여기어)!”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같은 멜로디가 이어졌다. 이다음엔 1절과 같으니 생략하시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끝까지 불러야 할 모양이었다.


“Lascia ch´io pianga la dura sorte(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a(자유를 그리며 한숨짓도록 두소서).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한숨짓도록 두소서, 한숨짓도록 두소서, 자유를 그리며)!

Lascia ch´io pianga la dura sorte(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E che sospiri la liberta(자유를 그리며 한숨짓도록 두소서).”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선생님은 후주까지 연주하셨다. 울다 지쳐 얼굴을 묻고 잠든 화자의 등에 살며시 담요를 덮어주는 손길처럼 상냥하고 자애로운 음색이었다.

이윽고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나는 눈을 떴다. 어쩐지 분위기가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것 같았다.


“잘 부르네. 혹시 성악 배웠니?”


무방비 상태로 너무 과분한 칭찬을 맞아버린 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요, 그냥 어머니께서 노래하시는 걸 듣고 자라서요...”


“어머니?”


“네.”


“어머니께서 음악을 하셨니?”


“아니요. 그냥 평범한 주부세요.”


그 시절 가난한 집안 살림에 딸한테 음악같이 비싼 걸 가르쳤을 리가. 그저 타고난 재능이다.

가난하다, 친척 집에 얹혀산다 업신여기던 사람들도 노래를 부르면 엄마를 달리 보았다고 하셨다. 야박하기만 한 세상이 한 구석이나마 엄마에게 있을 자리를 내어준 느낌이었다고 하셨다.

갑갑하고 어두운 엄마의 인생에 한줄기 빛이자 숨통. 엄마가 평생 목말라하던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샘. 그것은 노래와 직장이었다. 그중 하나를 내가 앗아가서, 그래서 엄마가 그토록 절실히 노래를 부르셨는지도 모른다. 사라져 가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서. 요리를 하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청소를 하면서, 빨래를 널면서, 한때 엄마는 거의 하루 종일 노래를 하셨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엄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


선생님은 놀라움과 연민이 섞인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시고는, 이제 가도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음. 29번인가?”





음악실이 있는 별관에서 교실이 있는 본관으로 향하는 길에 아랑이 다가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너 의외로 다재다능하다?”


“뭐가?”


“말하는 거 보면 공부도 제법 하는 거 같고, 그림도 잘 그리고, 거기에 노래까지? 어얼~”


“죄다 평균이거나 거기서 아주 조금 위일 뿐이야.”


봄이 무르익은 열기에 얼굴이 데일 것만 같았다. 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야 이거? 겸손한 거야, 아님 겸손을 가장해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까는 거야?”


“나도 평범해. 천재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도 없어. 평균보다 조금 잘해봤자 죄다 밥벌이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인걸.”


“야. 너 가끔, 아니 꽤 자주 극단적인 거 알아?”


“극단적?”


“방금 그 말은 천재가 아니면 의미가 없고, 돈벌이가 안 되면 아무 소용도 없단 뜻이잖아.”


“어, 바로 맞혔어.”


내 요지를 아주 잘 파악했네 하고 나름 칭찬한 건데, 아랑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뭐 해? 1분밖에 안 남았어, 뛰어.”


반장답게 맨 마지막으로 음악실을 나온 정우가 우리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졸지에 꼴찌가 된 나와 아랑은 정우를 따라 뛰었다. 별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교실이 있는 탓에, 부지런히 걷지 않으면 끝에는 꼭 뛰어야 했다.


딩동댕동-


“하아, 하아...”


“세이프...”


딱 종칠 때 교실로 돌아온 우리는 각자 자리를 향해 흩어졌다. 정우가 말한 대로였다. 노대수와 사건이 있고 얼마 안 되어 자리가 바뀌었다. 이번엔 남자와 여자 번갈아 키 순서대로 앉아서 아랑은 중간에, 나는 맨 뒷줄에 앉았다.


자리가 바뀌었으니 이젠 아침마다 인사할 일도, 쉬는 시간에 툭툭 건드려올 일도 없겠구나 했다. 가끔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로 남게 되겠지, 그랬는데.


딩동댕동-


“야!”


아랑은 여전히 틈만 나면 곧잘 나를 찾아온다. 한결 같이 어벙한 미소를 짓고서.

비어 있는 앞자리 의자에 아랑이 털썩 앉았다. 긴 머리카락이 찰랑하고 흔들렸다.


“혹시 어릴 적 사진 좀 가져올 수 있어?”


“사진? 사진은 왜?”


내가 퉁명스럽게 대해도 저 미소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이젠 적응을 한 걸까.


“너에 대해서 쓰려면 널 잘 알아야 하잖아.”


“아, 그거... 난 또 뭐라고.”


나는 딱히 볼 것도 없으면서 교과서를 펼쳤다. 일부러 눈을 피해도 아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전부터 알던 사이도 아니고, 그래서 너 어렸을 때는 어땠는지,”


“생각해 봤는데.”


나는 책에 눈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러다 방금 건 꽤 기분 나빴겠다 싶어 금방 후회가 되었다. 얼른 아랑의 기분을 살피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걸 들키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정작 아랑은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여전히 미소를 띠고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걱정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우리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내 얘기를 막 맡기는 건 좀 그래.”


“어..?”


아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걸 보자 나도 몰래 다시 소심해졌다.


“그러니까... 네 스타일도 모르는데 좀...”


기껏 생각해 낸 변명이 참. 솔직히 아랑이 뭘 어떻게 쓰던 상관없다. 그저 망설임 없이 직진해 오는 그녀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적당히 떨어져서 자연스레 멀어지도록.


“보여줘?”


“어?”


“내 글 스타일이 알고 싶다며.”


아랑이 벌떡 일어나 자기 자리로 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고 말도 못 하고, 답답하다. 쟤는 어쩜 저렇게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어떻게 저렇게 단순할 수가 있냐고.

어째서 쟤는 내가 꼬고, 꼬고, 또 꼬아놓은 매듭을 이렇게나 쉽고 허망하게 풀어버리는 걸까.


아랑이 가방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어 들고 왔다.


“자.”


나는 그녀가 내민 공책을 받아 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아랑이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아. 봐도 돼.”


머뭇거리며 펼친 공책 첫 장에는 떡하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랑 옹주 전]


“.........”


탁. 나는 공책을 덮고 아랑에게 되돌려주며 말했다.


“계약 파기를 원합니다.”


“아하하! 왜애~ 아직 제대로 읽지도 않았잖아.”


아랑이 까르르 웃으며 공책을 책상 위에 펼쳐 보였다.


“제목은 임시로 붙인 거야. 아직 캐릭터 설정만 해놔서.”


임시로 붙였다는 그 오글거리는 제목 다음엔 캐릭터 그림과 설명이 있었다. 맨 처음 등장한 인물은 삼국시대 귀족 복장을 한 반묶음 긴 생머리의 귀여운 여자아이, 아랑이었다. 그녀는 버드나무 밑에 서서 윙크를 하고 있었다.


‘임시는 무슨. 결국 자기가 주인공인 얘기 맞잖아.’


나는 그림 옆에 적혀 있는 캐릭터 설정을 읽었다.


[옹주(왕의 후궁의 여식) 임.]


아무리 미니멀리즘이 유행이라지만, 정말 심플 그 자체였다.


다음은 딱 봐도 남자 주인공인 잘생긴 청년이었다.


[운빈. 화랑.]


변함없는 여백의 미. 이로써 배경은 신라인 걸로 확정되었다. 신라인이지만 가히 미청년의 덕목이라 할 앞머리를 내린 단정한 쇼트컷 헤어스타일에, 신라인이지만 백인 뺨치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푸른 눈을 소유한 남주는 평소에는 부드러워도 불의를 보면 불같이 분노할 주인공의 정석처럼 보였다.


‘이게 얘가 기대하는 첫사랑의 이미지인가.’


나는 절반의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잘 생겼다.”


“그치? 멋있지?”


“응.”


샤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다음 등장인물은 외국인이었다. 금빛 단발머리에 당돌한 푸른 눈, 다부진 입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는 18세기 프랑스의 왕궁 근위 대장 같은 느낌의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만 좀 더 기르고 파마를 하면 저기 어디 베르사유에 피어있는 장미가 떠오를 것 같은 이미지였다.


[클랜시. 나이트.]


‘아랑 옹주를 두고 운빈과 겨루는 라이벌, 뭐 그런 건가?’


점점 이 “아랑 옹주 전”이라는 것에 흥미를 잃어가던 나는 그만 다음 장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풉!... 커억!”


“야, 앙마야! 너 노래 꽤 잘하더라? 너 뒤에 안 불러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하하!”


뒤에서 몰래 접근한 다윗이 내게 헤드락을 걸었다. 나는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김다윗, 너 이거 안 풀었..!”


“응? 이건 뭐냐?”


다윗은 헤드락을 풀고 공책을 집어 들었다.


“푸하하! 억실이? 이름이 뭐 이래? 생긴 것도 무슨 조선시대 노비나 산적처럼 생겼는데?”


엄지척을 날리며 시원하게 웃고 있는 그 억실이라는 캐릭터가 실은 자신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깔깔대며 웃었다. 캐릭터의 본질을 알아본 그의 눈썰미에 크게 만족한 아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치? 임꺽정을 생각하면서 그린 거야.”


“임꺽정? 나 임꺽정 엄청 좋아하는데.”


“어, 맞아. 저번에 말한 게 생각나서 그렇게 디자인했어.”


“응? 어, 그래?”


아랑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다윗은 우리 둘의 눈치를 보며 씩 웃었다. 아랑은 그저 웃기만 했고, 나는 ‘너 자신을 알기’엔 자아성찰이 한참 부족한 그에게서 공책을 뺏어 들었다.


다음은 상냥하게 웃고는 있지만 절대 만만하지 않을 거 같은, 금방이라도 독설이 입에서 바늘 비처럼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승려, 하은이었다. 다윗이 그림에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어, 이거 정우다!”


아랑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우처럼 보여?”


“응. 딱 봐도 알 거 같아.”


그러고 보니 아랑의 그림은 캐릭터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림체가 동글동글하고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3등신 디자인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그림은 자기가 훨씬 더 잘 그리네. 뭐랄까, 이건 그림 실력도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관찰력과 표현력. 세세한 디테일까지 포착하여 그려내는 능력. 나더러 재능이 어쩌고 하더니, 자기야말로 진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윗이 임꺽정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


저 반짝이는 눈으로 줄곧 우리를 지켜봐 왔던 걸까. 묘한 기분이 든다.


샤락. 다음장을 펼친 나는 잠시동안 굳어 있었다.


“...... 야.”


“응?”


“이거, 혹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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