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 한 곡만 더 불러주라.”
“싫어.”
“죽기 전에 꼭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단 말이야.”
“그럼 처음부터 그걸로 부탁하지 그랬어?”
“네가 이렇게 짜게 굴 줄 몰랐지.”
“먹을 것도 없는데 노래는 무슨.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야.”
“아니지. ‘노래는 마음의 양식이다’란 말 몰라?”
“... 그거 노래가 아니라 독서 아냐?”
“독서나 노래나. 그리고 이렇게 추운 데서 잠들면 죽는다고. 노래라도 불러야 깨어 있지.”
“... 굶어 죽을지는 몰라도 얼어 죽지는 않을 걸.”
“어떻게 그렇게 장담해?”
청년은 눈을 감았다.
- 그거 알아? 눈의 여왕의 첫 번째 키스는 추위를 잊게 만든데.
- 두 번째 키스는... 가족과 친구들을 잊게 만들지.
- 그럼, 세 번째는?
“... 세 번째가 없었으니까.”
<11년 전>
아랑과 다윗의 눈이 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엔 무뚝뚝한 얼굴을 한 검은 머리 캐릭터가 있었다. 시선이 보는 사람을 향해 있던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그의 눈은 멍하니 다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 너 맞아.”
내가 알아봐서 기쁜지 아랑이 활짝 웃었다. 나는 그림 옆에 적힌 캐릭터 소개를 읽었다.
[관솔. 흑마법사. 단검 소지.]
마법사라면 거리를 유지하며 공격해야 하는 직업이고, 게다가 흑마법이니 확실히 나랑 어울리긴 하다. 그런데.
“마법사가 단검은 왜 들고 다녀?”
아랑이 당연하지 않냐는 듯 대답했다.
“마법사니까 들고 다녀야지. 근접전에서 쓸 무기도 필요하잖아.”
“......”
단검이라. 우연치고는 절묘하다며 속으로 씁쓸히 웃고 있는데, 다윗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관솔? 무슨 이름이 그래? 관우 동생이야?”
악의가 없는 건 알겠다만, 그래도 내 캐릭터인 만큼 저걸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래도 억실이보단 낫지?”
“어, 그건 그치.”
“그렇지?”
“응. 흐흐.”
동상이몽. 나와 다윗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웃었다.
“아랑 옹주 전”의 캐릭터 소개는 그 이후로도 조금 더 이어졌다. 뒤에는 주로 아랑의 친구인 우리 반 애들이었다.
마지막 캐릭터까지 다 보고 나자, 다윗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이거 우리 얘기지?”
“응.”
“그럼 나는? 난 없어?”
“어? 아까 나왔잖아.”
“아까? 언제?”
“꽤 앞쪽에.”
“앞에? 나 여기 오기 전에?”
서로 맞지 않는 기억을 맞대며 더욱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길래, 나는 그 둘의 기억을 잡아다 한 곳으로 모았다.
“아까 임꺽정 있었잖아.”
“어..?”
다윗이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기에 나는 친히 쐐기를 박아주었다.
“억실이, 그게 너야.”
“... 어?”
아랑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맞다! 너 여동생도 있다길래 여동생 캐릭터도 구상해 두었어. 덕실이라고, 이름처럼 정말 참한 아이야. 억실이 덕실이, 어때? 나 이름 정말 잘 지었지?”
나는 진실의 늪에 빠진 다윗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그저 이야기일 뿐이야.”
딩동댕동- 뭔가 어수선했던 쉬는 시간이 드디어 끝이 났다. 다윗은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터덜터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랑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공책 가지고 있어. 다음 것도 있으니까.”
그녀는 다음 쉬는 시간에 또 내 앞자리로 와 앉았다. 뭐가 더 있나 불안했는지 다윗도 합류했다. 그는 옆에 있는 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뭐야 이거? 정령?”
이번엔 판타지 소설이었다.
“응. 여긴 태양이 없어서 대신 달빛을 에너지원으로 삼고 살아가거든? 그런데 그걸론 충분하지 않아서 정령들이 세상의 유지를 위해 힘을 빌려주는 거야. 어때? 되게 예쁘지?”
설명하는 내내 아랑의 표정에선 자신의 오리지널 스토리에 대한 깊은 애착과 자부심이 드러났다. 나는 먼저 긍정을 해준 다음 지적을 시작했다.
“신비롭긴 한데, 설정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는데?”
“오류?”
“태양이 없는데 어떻게 달이 빛나지?”
“아, 그러네. 달은 혼자선 빛을 못 내잖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다윗도 거들었다. 당황한 아랑은 엄지손톱을 물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며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럼 태양이 없는 건 아니고, 있는데 안 보이는 걸로 하면 어때?”
“어떻게?”
“자전을 안 하면...”
“자전을 안 하고 공전을 하면 태양이 안 보일 수가 없지.”
“아, 아니다. 그거 말고, 뭐였지? 달이 한 면만 보인다고...”
“자전 주기랑 공전 주기가 같은 거?”
“어, 그거. 그렇다고 하면 어때?”
“행성의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가 똑같다면 행성의 뒷면에서는 태양이 안 보이긴 하겠다. 우리가 달 뒷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치? 그럼 문제없는 거지?”
아랑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위에 다시 한번 고증의 소금을 뿌려 주었다.
“그런데, 그럼 굳이 왜 효율이 낮은 달빛을 이용해서 살아? 태양빛이 비치는 앞면도 있는데.”
“......”
굳어버린 아랑의 얼굴은 되살아날 기미가 안 보였다.
“다음.”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공책을 넘겼다.
“... 이건 또 뭐야?”
새로운 얘기가 나오자 다시 살아난 아랑이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나서 떠난 그녀를 함께 찾으러 다닌다는 얘기야. 여행을 하면서 두 남자 사이에 우정이 싹트는 거지. 어때, 멋있지?”
나와 다윗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아랑을 쳐다보았다.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 못했던지, 아랑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뭐가 또 잘못됐어?”
“멋있는 건가? 매우 이상한 거 아냐?”
다윗이 나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물론 나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맞아. 그게 가능이나 해? 같은 여자를 좋아하면 둘이 라이벌인데, 그 여자를 찾으러 같이 다닌다고?”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반박당할 때는 곧잘 수긍하던 아랑도 이번에는 물러날 수 없다는 듯 강한 어조로 대응했다.
“그게 어때서? 물론 처음에는 껄끄럽겠지만 여행을 하면서 점점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같은 상처를 가진 입장에서 서로 위로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는 거잖아?”
다윗은 소리 없이 “오, 주여”를 읊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남자들의 심리를 잘 모르는구나. 보통은 안 그래.”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합세했다.
“그치. 남자 둘이 여행하는 것까지야 뭐, 그럴 수 있다 쳐. 하지만 그 여자를 찾고 나면 어떻게 되는데? 중간에 우정이 싹텄다며. 근데 끝에는 둘이 한 여자를 놓고 싸우게 되는 거야?”
“오우, 뻘쭘하겠다 야.”
다윗이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랑은 질렸다는 눈으로 우릴 째려보았다.
“뭐야, 남자들은 머릿속에 경쟁밖에 없어?”
“그게 수컷의 본능이니까.”
“칫, 알았어! 그럼 끝까지 못 찾는 걸로 하면 되잖아.”
아랑의 폭탄선언에 나와 다윗은 ‘뭉크’의 작품처럼 절규했다.
“오우, 노!”
“야, 그건 진짜 아니다.”
“아, 이번엔 왜?”
“끝까지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데?”
“뭐가?”
“남자 둘이, 계속 다니는 거?”
“으으~”
다윗이 몸서리를 쳤다. 아랑의 손이 먹이를 낚아채는 솔개처럼 공책을 가져갔다.
“됐어! 너희랑 더 말 안 해!”
그 뾰로통한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왠지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웠다.
“근데 죄다 설정뿐이잖아. 글은 어디 있어?”
“컴퓨터에 있지. 요새 누가 손으로 써?”
“로망이 없네~ 아날로그의 향수라든지, 작가 지망생이면서 그런 감성은 없는 거야?”
아랑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감성?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그런 소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난 작가 지망생이 아니잖아. 게다가 네 스타일을 보여주겠다며. 난 아직 못 봤는데? 이래서야 엽서 받을 수 있겠어?”
“아, 됐어! 안 받고 말아.”
“오케이, 그럼 그건 없던 걸로...”
“엽서?”
다윗이 관심을 보이며 끼어들었다. 아차,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서 너무 나불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랑이 왱알앵알 그에게 일러바쳤다.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하신 최솔 님께선 멀리멀리 떠나시는 게 꿈이랍니다.”
“뭐? 어디로? 왜?”
다윗은 이젠 눈까지 휘둥그레 뜨고서 물었다. 이 귀찮은 상황을 어떻게 넘길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랑이 냉큼 대답했다.
“세상의 끝이라나, 뭐라나.”
“세상의 끝? 그게 어딘데?”
“몰라아~ 감성이 너어무 풍부하셔서 자기도 어딘지 모르지만 그냥 가고 싶으시대~”
“그냥 장난으로 해 본 소리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별일 아닌 척 넘기려는데, 어째 다윗의 표정이 굳어졌다.
딩동댕동- 때마침 구원과 같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흥!”
온몸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아랑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와 달리, 다윗은 조용히 일어나 의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내게 물었다.
“너... 혹시 안 좋은 일 있어서 그래?”
“어?”
“이것들이! 빨랑빨랑 안 앉아!”
성격 급하신 화학 선생님의 고함소리에 어물쩍대던 아이들이 후다닥 흩어졌다. 다윗도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더는 말 안 하겠다던 아랑은 과연 점심시간에는 본체만체하더니, 5교시 이후 쉬는 시간에 또 날 찾아와 퉁명스럽게 요구했다.
“내일 사진 가져와.”
나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었다.
“뭐라고?”
“사진! 어릴 적 사진!”
“그 얘기 끝난 거 아녔어?”
“아 정말, 갖고 오라면 좀 갖고 와! 이러쿵저러쿵 말 돌리지 말고!”
“풉, 알았어.”
그때, 못 보던 얼굴이 교실 앞문에 나타났다. 백인처럼 새하얀, 주근깨 박힌 피부에 주황빛이 도는 밝은 갈색 단발머리. 분명 오늘 처음 보는데 어째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 여자애는 문가에 서서 교실을 한번 죽 둘러보더니, 망설임 없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꼭 누구랑 싸우고 온 것처럼 심통 난 표정의 그 애는 내 앞, 정확히는 아랑이 있는 내 앞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를 보고 아랑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 시유야. 우리 반에는 어쩐 일이야?”
그제야 나는 저 얼굴이 낯이 익은 이유를 깨달았다.
‘클랜시.’
“아랑 옹주 전”에 나오는 금발머리의 외국인. 그의 실제 모델이 나타났다.
<11년 후>
“... 초이?”
불안한 정적. 불러도 대답 없는 상대를 남자는 다시 한번 불렀다.
“초이? 자?”
이번에도 청년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옆을 돌아보았다. 청년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자면 안 돼. 일어나.”
청년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남자가 침낭 밖으로 나왔다. 미약하게나마 그를 지켜주던 온기가 싸늘한 공기 속으로 스러졌다. 보호막 없이 추위의 공격을 그대로 받으며, 남자는 청년에게로 천천히 기어갔다. 굶주림 탓인지 그 정도 움직임에도 현기증이 났다.
마침내 청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현기증이 사라지고 구역감이 일었다.
“초이? 야, 일어나 봐.”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는 몸. 지그시 감은 눈. 살짝 벌어진 보랏빛 입술. 남자는 청년의 침낭 위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저었다. 눈이 빠질 것처럼 아픈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지난 4년간의 기억이 회환의 색으로 갈아입고 비통한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 안 얼어 죽는다며, 이 구라쟁이.”
그는 꺽꺽거리며 울부짖었다.
“제발, 이 나쁜 새끼야! 나 혼자는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