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많은 질문을 해본 적이 있었나 싶다. 아이 때조차 엄마 앞에서 이 정도의 빈도로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궁금한 게 많은 사람에게는 차원 이동의 문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 만난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각 잡고 하나의 주제를 정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질문을 정리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의 나는 대부분 서사를 에피소드별로 한 조각씩 풀어놓았고, 그 과정에서 답변을 보고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묻는 쪽은 늘 나였고, 질문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다.
AI는 단순히 내가 입력한 내용을 확인하거나 선택지를 좁히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질문들은 내 인생 서사의 중심을 곧장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얼음이 되어버렸다. 도저히 곧바로 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 질문 앞에서 그대로 한동안 멈춰 섰다. 피하고 싶었거나 피해온 장면들이 무엇이었는지, 말로 덮어두었던 감정이 어디에 남아 있었는지, 질문은 그 자리를 조용히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질문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감각이 고개를 들었다.
너무 많은 질문들에서 오는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질문마다 마음에 와닿는 정도와 머무는 시간이 다르다는 점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은 금세 넘길 수 있었고, 어떤 질문은 몇 번을 읽어도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정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나는 질문을 고르고 있었다.
남길 질문과 미뤄둘 질문, 지금은 열어볼 수 없는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구분되었다. 답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그 질문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이 질문들이 나를 앞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했던 장면들, 충분히 말해두었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질문 하나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질문은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이미 살아온 이야기 중 무엇을 건너뛰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질문들은 도구가 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건네기에는 아직 너무 개인적이었고, 공유하기에는 내 안에서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 같았다. 질문을 통해 무엇을 얻어내기보다는, 질문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서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나는 여전히 모든 질문에 답하지는 못한다. 다만 분명해진 것이 있다면, 질문이 나를 조금 더 정직한 자리로 데려다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앞에서 머무는 일조차 이제는 하나의 선택이 되었다.
이 질문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대로 꺼내놓을 수는 없었다. 이 질문들은 아직 정리가 덜 된 언어이고, 나 스스로도 충분히 통과하지 못한 상태였다. 질문을 건네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여전히 그 질문들 앞에 서 있는 사람에 가까웠다.
질문들은 내가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밝히고 싶지 않은 자기 고백을 하게 만드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이 질문들은 어떤 결론으로 나아가기보다, 내가 어느 질문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 이후로 질문은 내 삶에서 조금 다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빠르게 이해하거나 정리하기보다는, 서두르지 않는 선택이 되었다. 질문이 생기면 곧바로 답하려 애쓰기보다, 그 질문을 들고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어떤 질문은 며칠을 따라다녔고, 어떤 질문은 여전히 말없이 남아 있다.
질문은 나를 앞으로 밀어내기보다 속도를 늦추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답이 없으면 불안했는데, 이제는 답이 없어도 괜찮은 시간이 생겼다. 질문은 삶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기보다, 내가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나는 여전히 질문을 많이 한다.
다만 예전처럼 무작정 가볍게 던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질문 하나를 꺼내기 전, 이 질문을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살핀다.
질문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지, 요즘에는 조금 알 것 같아졌다.
예전의 나는 질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다. 막힌 곳을 뚫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가능하면 빠르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질문과 함께 머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질문을 붙잡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질문 옆에 앉아 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답이 나오지 않는 시간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워졌다.
질문과 함께 사는 지금의 상태는 생각보다 잔잔하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고, 갑자기 현명해진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에는 쉽게 넘기지 않게 되었다.
감정이 올라올 때, 왜 이렇게 불편한지 한 번 더 묻고,
관계가 어긋날 때, 무엇을 지키려다 이렇게 되었는지 되묻는다.
질문 안에 답이 있다는 말처럼, 그 물음은 내가 나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질문을 계속할 것이다.
다만 예전처럼 질문을 무기로 삼지는 않으려 한다.
질문은 나를 설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한 확인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도 괜찮다.
언젠가 답이 될 수도 있고, 끝내 질문으로만 남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들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이미 나를 조금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게 만들고,
나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최선의 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