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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May 11. 2023

문경훈의 음주동행(音酒同行) 26

행복의 나라로

  ‘내가 알던 형들은 하나 둘 날개를 접고 아니라던 곳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난 아직 고갤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 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어.’ 이장혁의 노래 ‘스무살’의 인상 깊은 첫 소절이다. 내가 날아가려던 낯선 길은 어디였을까. 형들이 아니라던 곳은 또 어디였을까. 내가 날아가려던 곳을 명확하게 정의할 순 없지만 역시 낯선 길임은 확실하다. 모두가 가는 길 말고 다른 길이 가치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아왔다. 그리고 난 여전히 다른 길에 서있다.


  스무살 무렵, 우리가 펼쳐놓은 지도도, 목적지도 달랐지만 이제 막 길을 나선 참이기에 차이는 크지 않았다. 옆을 보면 늘 친구들이 있었고 앞에는 형들이 있었다. 내가 가는 길도 멋질 거라고 분명 더 빛날 거라고 주문을 외며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렇게 내딛던 발걸음이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만들어냈다. 분명 얼마 오지 않은 것만 같은데 뒤돌아보니 한참이나 와있더라. 근데 이제는 앞에 보이던 형들도, 옆에 보이던 친구들도 보이지 않는다. 정신 차려보니 형들은 노래 속 가사처럼 이제 날개를 접고 슬며시 다른 길을 걷고 있었고 어떤 형들은 늙은 상이군인의 훈장이라도 되는지 다른 길을 걷던 과거를 뽐내며 이제는 다른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다른 길이지 틀린 길이 아니니 변절이네 뭐네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저 앞에서 옛날엔 그렇게 강해보이던 형이, 이제는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 되어 고뇌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많이 괴롭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 고뇌와 괴로움 또한 나의 것일 거라고. 


  인생이 커다란 경기장이라면 친구들은 적어도 다수가 걸어왔기에 보증된 길을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고, 관중들은 그 길이 아니라며 냉소를 퍼붓거나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길을 가라며 다그친다. 사실 관중보다도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를 다그친다. 비교하고 꾸짖고 자꾸만 멈춰 세운다. 그래서 무섭다. 나도 날개를 접을까 봐. 아니, 사실 날개 따윈 애초에 없었을까 봐 무섭다. 정의니 노동이니 사회주의니 생태니 소수자의 권리니, 나를 구성하던 말도 안 되는 사상의 편린들이 이제는 내 삶에서 쓸모없어질까 봐 무섭다. 케케묵은 옛 시대의 가치였는가, 내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들이 이제 족쇄가 되어 나를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뜨겁게 해가 내리쬐는 사막 위를 정처 없이 맨 몸으로 걷고 있는 듯했다. 어떤 미주(美酒)로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이 느껴졌다. 내 목을, 온몸을 쥐어뜯고 싶었다.


  신형철 평론가는 저서 『인생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 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그 말처럼, 지금까지 위대함을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이 노가수의 노래가 이제야 내게 다가왔다. 지금 내가 절실히 기다려온 노래가 바로 한대수의 노래였다. 6·70년대 세시봉을 중심으로 한 음악감상실에서 청춘들은 해외의 유명 곡들을 우리말로 바꿔 불렀다. 이연실의 소낙비나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같은 이른바 번안곡들이 그렇게 유행했다. 그리고 그즈음 김민기, 방의경, 한대수같은 이들이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 포크 음악은 몇 계단을 성큼 올라갈 수 있었다.


  1974년 발표된 1집의 ‘물 좀 주소’는 그야말로 시대를 뒤흔든 파격이었다. 노래 이전에 이미 앨범 커버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얼굴을 쥐어뜯으며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와 그 남자가 절규하며 내던지듯 외치는 ‘물 좀 주소’. 물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혹자는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민주주의로 해석했지만 그 자리에는 우리를 살게 하는 무언가를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는 사랑일 수도 누군가에겐 신념, 누군가에겐 자유일 것이다. 한대수는 상실의 갈증을 피맺히듯 토해냈다. 절규한다기보다는 거칠게 그리고 무심하게 툭툭 내뱉어냈다. 그의 카주 연주만큼이나 걸걸한 음성은 그렇게 시대의 아픔을 넘어 나에게 도착했다.


  ‘물 좀 주소’가 단연 위대한 노래임은 분명하지만 1집 「멀고 먼 길」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행복의 나라로’를 꼽겠다. 그것은 나름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은 힘들지만 끝에는 웃으리라는, 결코 날개를 접지 않으리라는 나만의 다짐이다. 광야는 넓고 하늘은 푸르다.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 1974년에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으나 곧 ‘물 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로’가 금지곡 판정을 받아 금지 음반이 되었으니 가히 얼굴 들기 부끄러운 시대의 아픔이었다. ‘바람과 나’나 ‘옥이의 슬픔’, ‘잘 가세’도 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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