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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곶사슴 Apr 30. 2019

관공서가 무서운 나이

퇴사 후에 오는 것들 #6


나의 전 직장 인사팀은 일을 참 잘했다.


나보다 먼저,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하게 된 나의 팀원은 마지막 퇴근길에 갑자기 물어볼 것이 생각나 사내 메신저에 들어갔더니 그 30분 사이에 접근 불가한 인물이 되었다며 그들의 빠른 행정업무에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이는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나 역시 퇴사일 저녁부터 메신저에 접속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일 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많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제 대화는커녕 그 기록도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백업이라도 해 둘걸. 기록이 없는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빠르게 잊혀지는 법이다.


회사와의 관계 단절은 메신저뿐만 아니라 국가와 나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국민연금, 국민건강보험 등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회사가 알아서 해주던 업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되어 돌아왔다.


처음 집으로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는 그냥 회사에서 나온 사실이 맞는지 물어볼 겸 공지하는 내용인 줄 알았다. 대충 훑어보고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다시 한번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 나는 국민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은 불량 시민이 되어있었다.


소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인데 이럴 수가 있나? 하며 알아보니 내 나이가 30살이 넘었기 때문에 소득이 없어도 보험료를 납부해야 하며, 부모님과 함께 살 경우 부모님 밑으로 피부양자 등록을 따로 해야 납부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첫 번째로 왔던 고지서에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내 이름으로 뭐가 날아온다면 꼼꼼하게 읽어봐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리하여 근처의 국민건강보험 민원실로 이런저런 서류를 들고 방문하게 되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생면부지의 창구직원에게

'나이 서른이 넘은 제가 또 망해버리는 바람에 소득이 0이 되어버렸어요! 부모님 밑에서 지내고 있답니다!'라고 고백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민원실에는 사람이 참 많았다. 민원실이라는 이름부터가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찾아가는 곳이니만큼 다들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신고하시려면 결혼 관계 증명서가 필요해요. 청구서에도 적혀있었을 텐데... 못 보셨어요?"

"저는 결혼한 적이 없어서 필요 없는 서류인 줄 알았어요."

"미혼인 건 저희도 확인할 수도 있는데, 이혼 내역까지는 안 나오거든요. 30대가 되면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니 서류가 필요해요. 주민센터에서 받아서 여기 팩스로 보내세요."


하루 종일 불만이 가득한 고객들을 만나는 것 치고는 매우 상냥했던 창구 직원은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듯 미리 프린트된 쪽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서류를 보낼 팩스번호와 추가로 필요한 서류의 목록이 적혀있었고, 나의 경우에는 '결혼 관계 증명서'란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렇구나, 보통 30대가 되면 결혼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구나, 나는 아직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쪽지를 받으며 새삼 우울해졌다.


아담 샌들러가 잘 나가던 시절에 찍은  영화 '웨딩 싱어'에서는 주인공이 파혼당한 뒤 남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다가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래 가사가 대충 이랬다. '나는 우리 이모네 다락방에 얹혀산다. 그래서 미래가 없다고 파혼당했다.' 그리고는 하객들을 향해 욕을 하다가 J.Geils Band의 'Love Stinks'를 부른다. 직역하자면 사랑 따위 개나 주라는 노래.


영화를 볼 당시에는 파혼당하고 엉망이 되어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장면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주인공만큼 나이를 먹고 나니 이모네 다락방에 얹혀산다고 고백하는 것에 많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랬다.


다른 또래 친구들은 결혼도 하고 독립도 하고 차도 사고 집도 사고 (물론 은행이 산다고 표현하긴 하지만) 사회인이라면 응당 실천해야 한다는 업적을 달성하고 있다는데 어떤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럽든 말든 서류를 뽑아서 보내야 했다. 어지간한 문서는 지하철에 있는 민원 자판기에서 뽑았던 기억이 있어 인근 역을 찾아갔더니 결혼 관계 증명서는 그곳에서 뽑을 수 없고 인근 주민센터에 직접 방문해서 뽑아야 한단다. 직원분이 굳이 주민센터라고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집과 애매하게 먼 거리에 있는 골목을 돌아 주민센터를 방문해야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결혼 관계 증명서를 발급받아 팩스를 보내야 했다. 우리 집에는 프린터기도 없는데 팩스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회사에서도 팩스를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보내야 한다면 잘 알고 있는 직원에게 부탁했던 것 같다. 인터넷으로 보낼 수 있다는 기억이 있어 찾아보니 해외 서비스를 이용해야 돈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좋은 기술이나 방법도 많은데 온갖 행정기관은 왜 아직도 팩스를 이용하는 걸까.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을 조합해 팩스를 보냈는데 이게 제대로 도착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 서류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나는 두 달 동안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은 불법 납세자가 되는 것이고, 다시 한번 '제가 아직도 소득이 없는데요...' 라며 고백하러 가야 할 수도 있었다.


마음이 불안해져 전화까지 해 보았으나 팩스가 도착했는지는 당신들도 확인이 불가능하고 나중에 한 번에 취합해 처리하니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하루가 지나니 잘 해결되었다고 문자가 왔고, 그 후로 국민건강보험에서 나를 찾는 일은 없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금을 100만 원가량 덜 냈으니 어서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받게 되었다.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인사팀에 가져가니 당시 인사팀장은 같이 이것저것 알아봐 주면서

"괜찮아요. 모든 서류는 돌릴 수 있답니다"

라는 쾌활한 답변을 들려주었고, 실제로 어찌저찌 잘 해결되었다. 이직하면서 내가 무슨 신고를 잘못했는지 전전 직장의 소득이 두 번 계산된 것이었다.


결국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고 실제로 그랬으나 저런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상당히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가 괜찮다는 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게 위로의 힘이며 그렇기에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정말이지 나의 전 직장 인사팀은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 모든 일이 내 나이가 30이 넘어서, 이제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른일까,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태연하게 처리해 내는 것이 어른일까. 이제 미혼이어도 안 한 건지 했다가 돌아온 건지 확인해야 하는 '어른'이건만, 아직도 나는 행정 업무를 만나면 덜컥 겁부터 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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