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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Sep 08. 2017

유교적 근대론이 대안일까?

<동아시아는 몇 시인가> 서평

몇 달 전부터 동아시아 담론을 탐색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나 개인의 얄팍한 공부이고, 월간지 만드는 일 때문에 많이 더디지만, 앞으로 꾸준하게 공부해서 어느 정도 시공간적인 조망도를 그리는 게 이 공부의 중간 목표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고민을 공유하고, 이야기도 듣고 싶다. 공부 역시도 과정이 중요하고, 개방적이고 다층적인 개입과 논쟁은 이 공부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대학원처럼 제도화된 공간에서 공부하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라는 제약 조건이 있다. 일상적인 세미나와 토론을 가질 공간도 한계적이다. 따라서 그때 그때의 부족함과 아쉬움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견해도 접하려 한다. 일단 동아시아 담론에 대해 정리한 책들은 좀 있지만, 내 나름의 리스트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재 읽는 책들을 서평 수준에서 하나하나 올리려 한다. 아직 어떤 질서도 없기 때문에 상당히 주먹구구식일 수 있다.


동아시아 담론이 주로 교통되는 공간은 역사학계가 아닐까 싶다. 아시아 지역연구나 사회과학 연구자들 차원의 담론도 활발하지만 담론에 대한 관심도나 연구자들의 범위는 아무래도 사학계가 더 넓어보인다. 요컨대 한국사학계는 동아시아 담론을 거치면서 더 다양한 논쟁들을 마주하게 된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이 일련의 주류경제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비판들에 의해 무기력하게 무너진 후, 한국 사학계가 뒤늦게 찾은 이론적 모색의 경로는 목적론적이고 발전론적인 역사관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미야지마 히로시를 비롯한 한국사 연구자들이 취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좀 다른 맥락이 있을 수 있는데 아직 이 이상 알지 못한다.)


너머북스 출판사에서 펴낸 '19세기의 동아시아' 시리즈는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에서 기획한 일련의 세미나들의 성과를 모은 것이다. 그 첫번째 책이 <동아시아는 몇 시인가?>로, 3년 전인 2014년 정년 퇴임한 미야지마 히로시와 현재 동아시아학술원에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는 배항섭 교수가 함께 엮었다. 우선 서문이 이 기획의 취지를 잘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이 책의 취지를 살피고, 나아가 이 책에 실린 논문들 중 흥미롭게 읽은 몇몇 논문을 소개하려고 한다.



머릿말인 <"동아시아는 몇 시인가?"라는 질문>에 따르면, 이 질문은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잃어버린 근대성 - 중국, 베트남, 한국, 그리고 세계사의 위험성>에서 제기한 것을 연원으로 삼는다. 우드사이드는 이 질문을 통해 서구중심주의에 입각한 역사 인식이나 시간관으로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이나 시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발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 인식에 근거하는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중심주의는 서구가 경험한 과정을 거쳐 ‘근대’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관이다. 이에 따르면 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은 비서구의 역사적 경험이나 근대 이전의 시간은 독자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저 근대 혹은 서구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 서구의 경험과 얼마나 유사하느냐, 서구가 먼저 달성한 근대성들에 얼마나 근접해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따라서 비서구와 전근대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매우 제약되고 왜곡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서구와 비서구, 근대와 전근대의 관계에 대한 단절적인 이해는 서구와 비서구, 근대와 전근대를 서로 엄격히 구별되는 하나의 통일되고 균질적인 시공간으로 전제하고, 의도치 않더라도 그런 효과를 유발시키는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가 그러한가? 혹은 서구와 비서구가 그렇게 엄격한 단절로 나뉘어져 있나? 그렇지 않다. 통념과 달리 중세성이든 근대성이든, 비균질적으로 형성하고 발전하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다. ‘중세’나 ‘근대’라는 역사적 시간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다양한 ‘중세적인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 ‘근대적인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며 구성된다. 즉, 혼재적/혼종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어느 정도의 단절적 규정으로 인해 찾을 수 있는 의미마저 너무 쉽게 부정해버리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배항섭은 20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의 세계사적 위상을 재조정하거나, 역사적 경험을 서구중심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하는 등의 방식으로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연구 경향이 대두되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캘리포니아학파'가 제기하는 '새로운 세계사'론이다. 이들은 근대 이후 서구가 대두된 것이 외부적이거나 우연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서구중심주의의 오만과 편견을 비판한다. 또,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이나 ‘유교적 근대론’을 제시하면서, 서구중심적 역사인식과는 결을 달리하는 역사상을 구축하려 했다고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역사학계는 여전히 서구중심적 인식에 지배되고 있다. 서구중심주의와 공모적 관계 속에서 비서구와 전근대를 식민화하는 근대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사’ 연구 역시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일정하게는 근대중심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이를테면 안드레 군더 프랑크 Andre Gunder Frank는 그의 역사적 저작 <리오리엔트 re-orient>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비판하기보다는 세계체제에 대한 기여도나 주도권을 둘러싸고 서구와 경쟁하는 아시아와 중국의 모습 부각한다. (참고로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세계 대전 이후 종속이론의 기틀을 닦은 좌파 연구자다.) 하지만 배항섭이 보기에 이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옹호하는 논리로 흐를 위험이 있다. 성장 지상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근대중심론과 발전론의 틀에 갇혀 있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으나, 근대—전근대의 비대칭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은 아직 본격적으로 제기되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사 연구의 주류적 역사인식인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이 대두됐었다. (박세연, '유사역사학은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갔는가', <오늘보다>) 둘 모두 한국사 전개를 서구 역사의 경험에 준거해 이해하고, '근대'라는 것을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시대 혹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서구중심적이고 근대중심적이라며, 식민지근대성론이 제기됐다. 근대성론은 도시, 청년, 지식인 등의 근대성 발현 양상을 연구하는 문화연구를 주요 무대로 삼는다고 한다. 배항섭이 보기에 이는 근대에 대한 비판이 분명하지 않고, 근대화론에 변별되는 지점이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또, 근대성의 내용으로 서구 근대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서구중심주의의 자장 안에 머물러 있고, 전근대와 근대를 연속이 아니라 단절적이며 대립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근대’를 ‘서구의 충격’ 이후 형성된 것으로 인식한다. 일국사적 접근을 보이며, 식민지 시기의 트랜스내셔널한 국면에 접근하고 식민지 간 비교연구의 필요성을 지적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배항섭이 보기에 이는 근대성론이 모든 전근대적인 것을 간단히 자신의 자장으로 포섭해버리는 '강력한 포식자로서의 국민국가 혹은 근대'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 극복의 가능성을 축소할 수밖에 없고, 전근대에 대한 근대의 힘을 특권화한다는 점에서 근대중심주의적이다. 또,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비판에 경도되어 있어 구체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거다.


‘19세기의 동아시아’ 연구기획에서 ‘동아시아’란 서구중심적이고 근대중심적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사와 동아시아사, 세계사를 재구성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시각이다. 비서구가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을 '소비'만 하는 게 아니라, 이론을 '생산하는 기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사회과학)의 현지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과학적 지식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또한 이는 ‘전근대’를 직선적 발전론적 시간의 도식에서 해방시켜 발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인식에서 탈피해 근대에 부여된 특권적 지위를 상대화하거나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야 ‘전근대’도 나름의 자율적 시간으로 재인식될 수 있고, 근대를 향해 발언할 수 있는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구중심주의 비판의 방법론들에는 ‘복수의’ 혹은 ‘대안적’ ‘근대성’ 개념이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근대성’이 단순히 장소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띤다는 지정학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크고, 근대중심주의를 재귀적reflexive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조르주 벵코 등은 ‘근대’ 개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보다는 구체적 역사 과정과 경험을 통해 ‘근대’의 내재적 모순을 드러내고, ‘근대성’ 개념이 지닌 분열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근대를 상대화하고 새로운 역사상을 구축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역사적 시간을 넘나드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공간적으론 서구중심적이고 단선적인 발전론과 결합된 자국중심적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trans-national’한 접근(비교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시간적으로도 전근대와 근대를 비교하거나 상호 연결해 이해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중세’ 혹은 ‘근대’가 동질적인 시간이 아님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비서구로부터 서구를 바라보는 역전된 시각이 요청되는 것처럼, 전근대로부터 근대를 바라보고 전근대의 관점에서 근대에 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배항섭이 보기에 동아시아의 19세기는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중심주의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수용된 시기였고, 서구와 동아시아가 본격적으로 만났으며, 전근대와 근대의 결절점을 이룬 시기였다. 따라서 각 지역 역사가 지닌 고유한 측면을 내부에서부터 분석할 필요가 있다. 비서구 전근대사회의 특정한 제도나 시스템, 삶이나 사유방식 등이 서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작동됐었는지를 전체사의 맥락에서 밝혀내야 한다. 그래야 목적론적, 발전론적 인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까지 충분히 고려하는 새로운 역사상을 구축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상상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나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 중 몇 가지 흥미로운 관점을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앞서 대안으로 제시된 '트랜스내셔널'하며, '전근대-근대의 상호 비교적 접근'을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연구들이었다.  대만 연구자 황쥔지에의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권내현의 <동아시아 은 교역과 조선>, 김선민의 <일국사를너머 변경사로 : 여진-만주족과 조선의 관계>, 김건태의 <"광작을 자제하라" :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가작과 그 지향>, 송양섭의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 정약용의 '인시순속'적 지방재정운영론>, 문명기의 <1920년대 한국과 대만의 자치운동> 등이 그것이다.


국립대만대 인문사회고등연구원 원장 황쥔지에는 20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아시아적 관점을 통해 당대의 동아시아적 관점을 살핀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던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동아시아에 대해 당대의 아시아 지식인들은 둘 중 한 가지 태도를 보인다. 하나는 아시아의 국가와 인민들이 전통을 버리고 훨씬 발전된 유럽과 미국의 문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믿는 탈아론이다. 이른바 아시아의 문화를 버리고 유럽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자는 '탈아입구'가 이것의 귀결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의 르네상스를 주장하는 것으로 쑨원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1880년 일본에 흥아회를 설립했고(1883년 아시아협회로 변경), “아시아 문화가 남겨준 이상적 황제의 역할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야만적 서양 문화의 마키아벨리적, 정치적 리얼리즘을 지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중국의 대표적 신지식인 리다자오 역시 ‘신아시아주의’를 옹호했고, 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와 상당 부분 유사했다. 이들은 공히 아시아의 결속을 옹호하고, 중국 내 세력 확장을 꾀하는 일본의 야심을 비판했다. 이들 신아시아주의(대아시아주의)론자들이 주장하는 '아시아의 번영'은 일본이 주장했던 ‘대동아공영권’과 달랐는데, 20세기에 접어들어 아시아 지식인들은 탈아시아와 아시아 번영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계속했다. 논문은 '동아시아란 무엇인가?'(혹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아가 어떻게 하면 억압된 동아시아적 주체성을 극복하고 재귀적 오리엔탈리즘에 빠지지 않고,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을까? 질문한다. 여기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담론들을 간략하게 살피는데, 워낙 소략하게 서술해서 당위적인 주장 외에는 고민 지점을 살피기 어렵다. 어쨌든 중요한 건 비교적 관점을 갖고 공통점 속에 존재하는 차이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여진-청 관계와 '변경사' 관점에 대한 김선민의 논문은 한국 사학계가 계속 조선-여진 관계에 대해 얘기할 때 조선이 여진을 복속했고, 어쩌구 하면서 중국 학계와 비슷하게 팽창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자국 역사의 영토 확장에 주력하고 있는데, 이게 다 당시의 '경계'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지적한다. 당대의 경계(국경)란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며 복합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근대국가들이 갖는 국경을 기준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선민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당시 여진족은 명과 조선 사이에서 밀당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외교를 구사했다. 오히려 함경도 지역은 여진-만주족의 여러 부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면서, 명과 조선이 경쟁하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근대적 관점으로 봐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이런 관점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변경사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그래야 근대로 이행해가는 과정의 여러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변경사적 관점이 무엇인가? 필자에 따르면 단선적, 영토중심적, 일국사적인 시각에서 탈피해 “역사적 공간을 서로 통하게 하고 그 공간 사이를 흐르는 역사적 조류를 밝히는 것”(페카 하말라이넨 & 사무엘 트루에트)이다. 기존 연구가 간과했던 '국사'의 영역을 넘나드는 '초국가적 주체'와 다른 민족의 경계를 왕래하는 다문화적 주체를 부각시키고, 이를 통해 “역사란 결말이 예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다양한 주체가 참여할 수 있음”이 강조된다. 이를 통해 역사가 일국사적 서사가 아닌 초국가적 서사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꽤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고, 흥미로웠다. 그간 '일국사적 관점'에 대해 당위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변경사적 관점이라는 개념은 이를 실천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틀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밖에 다른 논문들도 흥미롭고 지적 자극을 주는 지점들이 많았는데 그에 대해 가타부타 입장을 정하기에는 여전히 연구가 부족해보인다. 특히 유교적 근대론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 미야지마 히로시 등의 논문은 (그가 이 일련의 세미나들의 좌장과 같은 사람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많아보였다. 그것을 본격화해서 주장하기엔 근거가 그리 많지 않고, 반박 지점이 상당히 보이기 때문이다. 책임지기 어려운 총론(이를테면 '유교적 근대론')을 먼저 세우고 맞춤형 논거들을 어렵사리 찾아오는 방식의 연구보다는, 구체적인 쟁점과 사례들에 대한 끊임없는 비교적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적 관점'을 점층적으로 수립해나가는 과정이 보다 생산적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무는 당장 동아시아 혹은 한국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근대성을 만들어갔는지 조급하게 규명하기보다는, 매우 촘촘하고 구체적으로 '동아시아적인 것'의 성격과 역사성을 축적하고, 근대중심론과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동아시아 국제연대' 감각의 대중화, 즉 대안 사회를 위한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몇 가지 지점에서 매력적이다. 발전론적이고 목적론적 사관을 전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특정한 담론에서 이것을 위한 비판과 지향을 이처럼 꽤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처음 접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꽤 야심찬 포부다. 헌데 그 포부의 전망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보인다. 발전론적이고 목적론적 시각을 벗어나, 어떤 시간관과 역사 인식을 견지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그것의 지향이 어떤 정치적/이념적 지향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지표 역시 그려야 한다. 그것을 조망하는 것 자체가 목적론적인 역사 인식을 가리키게 될 우려도 있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여러 '해방'적 지향을 애써 모른척 하는 것으로 그 한계를 넘어설 순 없다. 이는 동아시아 담론의 미래(자본의 헤게모니 전략에 포섭되지 않고, 사회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담론 지형의 형성)를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다. 현실의 지평에 다가가는 동아시아 담론(들)의 실천 테제가 바로 여기에서 분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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