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일라하 일라 알라 …
이스탄불 하늘 아래로는 회색 모스크의 돔과 첨탑들이 물결같이 이어진다. 예배 시각을 알리는 코란의 독경소리(아잔)가 모스크의 스피커를 통해 거리로 흘러나오면 이스탄불이 ‘신앙촌’ 같은 도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터키의 특산품인 장미 오일, 크림 등을 파는 화장품 가게를 둘렀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다. 터키에서는 여자들이 가게 일을 보지 않는다는데, 그러다 보니 화장품 가게 주인도 남자들이었다.
마침 오후 6시가 되니 예의 그 아잔 소리가 들려왔는데, 우리와 신이 나서 물건 값을 흥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밖으로 사라졌다. 설마 했는데, 조금 있다 돌아와서는 아닌 게 아니라 예배를 보고 왔다고 한다.
나는 그러한 아버지의 행동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이, “라일라하 일라 알라, 앗살라무 알라이쿰”이라고 무슬림들 간에 쓰는 종교적 인사말을 건넸다. 아내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아랍어를 흉내 내 장난을 치는 줄 알고 혹여나 종교 모욕죄로 잡혀가는 줄 알고 잠시 걱정했단다.
이 인사말은, 아주 오래전 중동 붐으로 외국어대에 새로 생긴 아랍어과를 입학한 내 친구가 아랍어 배운 것을 자랑한답시고 밑도 끝도 없이, 심지어는 미팅 나가서 여학생 앞에서도 써먹어댄 것을 나 역시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 중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고 근대적 세속국가로의 탈바꿈을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유럽적 세속국가로 갈 것인가, 종교국가로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로 내부 갈등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벌이는 극한의 폭력과 갈등 뒤에 종교가 있다고 비판하며 이슬람 국가들을 그 예로 자주 든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는 서구의 근대 민족주의를 보면, ‘종교’ 대신 ‘민족’ 자체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유사종교를 만들어 정치적 폭력을 오히려 강화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나는 정교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에 제동을 거는 것을 본질로 삼는 종교가 21세기에 되레 인류를 위해 더욱 많은 일들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루에 다섯 번씩 코란의 독경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시간만이라도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며 반듯하고 경건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행위를 단순히 형식적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2. ‘둔자이‘라는 터키 친구
20년 전 미국서 안식년을 할 때, 지역 커뮤니티에서 무료로 하는 랭귀지 스쿨을 다니다가 둔자이(Tuncay Kimilli)라는 내 또래 터키 남자를 사귄 적이 있다. 그는 이혼한 아내의 허락을 받고 아들만을 데리고 3개월짜리 관광 비자로 미국에 와있던 차였다.
의사 일을 하다 휴직하고 왔다니, 터키서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했을 법도 한데, 오죽잖은 숙소에 머물며 푸드뱅크서 식료품을 구하기도 하고 월마트에서 산 가전제품을 환불이 가능한 시점까지 쓰다 반품하는 등, 내가 보기에도 참 아슬아슬한 미국 생활을 해갔다.
그럼에도 애를 학교까지 보내고, 정식 초청비자로 와있던 나보다 더 즐겁고 다이내믹하게 일 년 넘게 살다 돌아갔다. 미국 과부를 만나 재혼해 터키로 돌아가 애까지 낳고 산다고 했는데, 이후 적십자 소속 의사로 에티오피아 가서 일한다는 얘기까지 듣고는 소식이 끊겼다.
이 사람의 미국 생활이 다소 무모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적극적이고 낙천적이기도 해서 역시 유목민족 오스만튀르크의 후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탄불에서는 장사꾼들도 이렇게 넉살 좋고 엉터리기 있는 자들이 많다.
관광을 하다가 이들과 눈을 맞추지 말아야지, 일단 걸렸다 하면 그들의 가게로 어김없이 끌려 들어가 융숭한(?) 환대 속에 차 대접을 받고 물건을 사야만 하는 난처한 지경에 이른다.
물론 나도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기개(?)는 대단해 결코 강매를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터키인들의 장삿술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는 게, 어느 호텔 조식에서는 우리가 한국서 왔다고 하니 주방장이 호들갑을 떨면서도 재치를 발휘해 그날 나온 메뉴를 활용해 색다른 요리를 해주는 서비스를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독일에 터키인 이민자가 300만 명 이상 산다는데, 그들이 독일 사람들과 큰 갈등 없이 잘 살고 있는 것도, 어떤 환경에도 유연하게 적응하는 그들의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삶의 태도에 연유하는 것 같다.
3. 돌마바흐체 궁전의 ‘터키탕’
예전 국내에 터키탕이라는 목욕탕이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목욕 시설을 활용해 성적 서비스를 하는 일종의 퇴폐 유흥업소가 아니었지 싶은 생각이다. 그런데 거기에 왜 굳이 터키탕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그 구체적 사정은 잘 몰랐다.
이스탄불의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갔다, 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아랍 풍으로 재해석해 놓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다. 이곳 하렘에 바로 하맘이라 부르는 터키탕 시설이 있다.
하렘은 이슬람의 절대군주 술탄과 그의 여러 부인과 자녀들, 여자의 친척들이 함께 기거하는 공간이었다. 술탄은 왕권 유지를 위해 세습할 남자아이들을 보호하고 또 이를 충분히 공급하기 위한 여러 여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을 필요로 했다.
하렘 안으로는 바깥 남성들이 들어오는 것이 철저히 통제됐다. 그래서 남자들이라곤 내시만이 있었다. 또 내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농인(聾人) 서기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 터키의 수화 문학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유럽인들에게 이 하렘은, 술탄이 후궁과 난잡한 성적 향연을 벌이는 은밀한 공간으로 그 이미지가 왜곡, 변형된다. 오리엔탈리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슬람의 일부다처제가 하렘과 연결돼 무슬림 여성은 술탄의 성적 피해자가 아닌 음탕하고 난잡한 여인들로 표상되고, 터키탕 역시 이러한 서구인들의 시각을 거쳐 우리한테로 넘어온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터키탕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만 있는 건 아니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라는 별칭이 붙은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이색적인 터키 풍의 리듬과 멜로디를 만나기도 한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이스탄불의 지정학적 위치로, 터키는 서양 문화의 또 다른 원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