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테네의 소매치기꾼과 그리스 민족
그리스가 지금은 유럽에서는 다소 가난한 국가로, EU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지만 원래는 유럽 문명의 뿌리가 되는 자랑스러운 나라였다. 아테네 공항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와 신타그마(광장) 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할 때였다. 이곳이 아테네 지하철 역 중 가장 복잡한 곳으로 당시는 공교롭게도 저녁 러시아워 때였다.
플랫폼의 붐비는 인파 속에서도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수다를 떠는 4명의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칸을 탔는데, 개중에는 인형을 포대기에 싸 아기처럼 안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열차를 타자마자 우리 부부를 에워싸고 밀착해서 배낭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노골적이라서 어이가 없었지만 철저히 대비한 탓에 분실한 건 없었다.
이들은 소매치기를 마치 놀이 삼아하듯이 하는데, 가령 자신들의 기량(?)을 발휘해서 훔치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고 하는 식이었다. 다른 승객들도 그냥 그러려니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기분도 나쁘고 혼쭐이 나기는 했지만 아테네가 의외로 범죄율이 낮다는 얘기는 들었다. 이들의 소매치기는 일종의 좀도둑질로 결코 흉기 따위의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테네의 소매치기가 극성이긴 극성이었던 게, 다음날 ‘성스러운 신들의 처소’인 아크로폴리스를 올라가는 초입에 중국인 관광객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미 범인은 사라졌고 그 비명소리는 물건을 분실하고 당황한 중국인의 넋두리였던 것이다. 워낙 중국인들 말의 억양이 높아 비명같이 들렸을 뿐이다.
과연 지금의 그리스는, 과거 위대한 그리스 문명을 탄생시킨 그리스 민족과 관계가 있는 나라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리스 민족은 이제나 그제나 다름없고, 고대를 살았던 그리스 민족도 특별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스 문명은 이미 그에 앞서 등장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 그리스는 우연히도 유럽 대륙에서 가장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어, 이들 문명의 불길이 유럽으로 옮겨 붙을 때 이와 가장 먼저 접촉할 유리한 기회를 가졌을 뿐이다.
물론 그리스 민족의 주체적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리스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변부에 위치했고, 국토가 척박했기에 오히려 지중해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이들이 오리엔트 문명을 수용해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독일 민족이 바로 위대한 그리스 민족의 후예라고 생각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뽐내며 베를린 도처에 그리스 문명을 흉내 낸 건축물들을 만들고 박물관을 꾸미고 했던 것을 보면 한 편의 역사 코미디였다고 할 수 있다.
2. 그리스와 그 이웃 터키
아테네에서의 첫날밤 숙소에 행장을 풀고 당연히 현지 음식을 먹기 위한 식당 순례에 나섰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인근 지역이라 관광객을 위한 식당들이 즐비했었다. 어느 식당을 들어가도 음식 메뉴들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터키의 케밥과 아주 유사한 기로스와 수블라키(치킨)가 아테네 식당의 주요 메뉴였기 때문이다.
기로스가 터키 케밥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는데, 그리스인들이 들으면 아마도 기분 나빠할 얘기리라. 그리스를 관광하다가 새삼 알게 된 사실이 그리스와 터키는 이웃이지만, 근세 들어서 그리스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던 탓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자랑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장식물들이 영국으로 반출된 데에는 터키도 나름 일조를 했다. 터키 지배 당시 파르테논 신전은 이슬람 모스크 등으로 사용되는 등 천대를 받았는데, 아테네 주재 영국 외교관이 터키 식민 당국을 매수해 파르테논 신전을 불법적으로 훼손해가면서 조직적으로 약탈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두 민족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안 되는 듯싶기도 했다. 산토리니에서 그리스인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관광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에게 바다 인근 섬들에는 그리스인과 터키인들이 뒤섞여 사는데, 양자의 외모가 잘 구분이 안 된다고 한다.
굳이 구별하자면 눈동자 색이 푸르면 그리스인, 검은색이면 터키인인데 그 구분이 뭔 대수냐 싶은 말투였다. 하긴 고대 그리스와 전쟁을 벌인 트로이가 지금의 터키에 속한 것인지 그리스에 속한 것인지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3. 아테네의 폐허를 둘러보며
아테네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깨끗하거나 정비돼있지 않고 꽤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크로폴리스를 지그재그로 오르는 비탈길의 집들 벽에는 그라피티가 어지러이 그려져 있고,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서 내려다보는 아테네의 도시 전경 역시 무질서하다.
파르테논 신전은 한창 보수 공사 중이라 기중기 등이 거치돼있고 어수선하다. 파르테논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내의 유명한 유적지는, 가는 곳마다 건물 잔해인 돌과 돌덩어리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널려 있으며 지붕이 날라 가버린 석주들이 불쑥불쑥 서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와 달리 모든 유적지들이 아주 말끔하게 정비돼 있어, 과연 이게 옛 것 그대로 복원시켜 놓은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런 곳을 가보면 오래된 유적지에서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오히려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이에 비해 고대 그리스 시대의 건축과 도시는 폐허가 돼버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셈인데 이게 마치 현재 영락한 그리스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옛 유적의 잔해들이 현대 도시 속에서 천년의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으로, 파르테논보다도 훨씬 컸다는 제우스 신전의 입구에서는 노인네가 구걸을 하며 관광객을 맞았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소년은 신전 마당에서 관광객을 졸졸 쫓아다니며 적선을 구하고 있는데 이런 데서 오히려 ‘폐허의 시학’을 느꼈다면 낭만적 과장일까?
숲 속 길에서 간신히 찾은 소크라테스가 갇혔다는 감옥도 그 자체로는 엉성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너머로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보이기에 관광객들로 하여금 여러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문명과 건축물은 영원할 수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지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를 지금의 시각으로 ‘쌈빡하게’ 복원하기보다는 그 원래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가면서 복원하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