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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의 추억

by 양문규

1.

대기업 직장에 다니던 딸애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미국의 대학원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요즘에는 직장 생활이 좋다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만나보기가 어려운지라, 애가 매일 무슨 노래 후렴구처럼 불러대던 ‘직장 다니기 싫다’라는 얘기를 늘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결국 퇴직을 결심했고 애 엄마는 더 늦기 전에 네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격려해(?) 먼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다행히도 회사 다니는 것보다 좋다며 표정은 훨씬 밝고 편안해 보였다.


아주 오래전 나는 미국으로 안식년을 갔고 아들과 딸애는 그 기간 미국서 잠깐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딸애는 그때 이후 20년 만에 미국 땅을 다시 밟은 셈이다. 애가 막상 그곳에 가서 다시 공부하게 됐다니 그때 딸애를 가르쳤던 담임선생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2.

내가 갔던 곳은 미국 중서부 내륙 유타의 주도 솔트레이크에서도 40여 마일 떨어진 프로보라는 조그만 대학 도시였다. 이곳은 모르몬 종교의 성지로 미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동네는 아니었다. 내륙이기도 하거니와 사람들이 종교적 심성을 갖춰서 그런지 아주 순박했다.


유타는 먼 옛날 멕시코 땅이었고, 우리 애들은 교육청에서 지정해준 대로 라틴계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극히 수수한 학교를 다니게 됐다. 새 학기가 시작돼 애들을 데리고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에 가보니 배정 학급이 몇 학년 몇 반으로 표시된 것이 아니라 담임선생의 이름으로 돼 있었다. 딸애는 미스 데이밍 반이었다. 데이밍 선생은 유타 바로 위에 위치한 아이다호 출신이다.


아이다호는 미국서도 감자 산지로 유명한데 데이밍 선생은 감자만큼이나 순박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선생님이었다. 데이밍 선생은 나의 서투른 영어를 얼른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해했다. 오히려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나였음에도 말이다.


데이밍 선생과는 집에서 늘 해야 하는 숙제, 그리고 가정방문 날짜, 정확히 시간까지 정하고 왔는데, 실제 가정방문 당시 선생님은 약속한 시간에서 일 분도 어긋남이 없이 찾아왔다. 학부형으로서 진땀 나는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애들이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오히려 귀국할 때 큰애는 로스엔젤리스에서 환승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자기 혼자라도 자전거를 타고 미국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이 좀 짠했다. 아마도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보살핌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팀파노고스1.jpeg 데이밍 선생의 수업시간


한 번은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전해 들었다. 어느 날 아내가 창밖을 보고 있노라니 누가 조깅하듯 급한 발걸음으로 우리 집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데이밍 선생이었다.


예고도 없이 어쩐 일일까 궁금해 얼른 문을 열었는데, 그녀는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선 사과의 말을 전한다며 웃음을 거둔 채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다소 당황하여 학교에서 딸애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그녀는 아이들이 딸애를 놀려서 애가 학교에서 울었는데 지금은 어떠냐고 되물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애의 눈이 약간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는데 애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다른 날과 똑같이 오빠와 함께 수영 가방을 빙빙 돌리며 수영 레슨을 받으러 갔다.


설사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별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일로 가정 방문을 하다니! 아내는 아이가 지금 집에 없는데, 그 일로 특별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 같지 않다고 얘기해줬다.


그러자 선생님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면서 학교에서의 상황을 아내에게 자세히 이야기해줬다. 음악시간이 오늘의 마지막 시간이었는데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딸애의 이름을 바꿔갖고 노래 가사 속에 넣어 노래를 부르며 딸애를 놀렸다고 했다.


그래서 딸애는 울음을 터뜨렸고 이것을 본 음악 선생이 데이밍 선생에게 얘기를 해서 세 명의 아이들은 혼이 났으며 딸애한테 사과의 말도 전했다고 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정황이야 알 수 없지만 선생이 애들을 정성으로 보살핀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크리스마스 때 데이밍 선생에게 초콜릿과 관광지 이름이 프린팅 된 아주 싼 값의 티셔츠를 선물했는데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새빨개져 몹시 수줍어해 내가 뭘 잘못한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로윈1.jpeg 핼러윈데이에 코스튬 의상을 한 데이밍 선생


3.

유학 간 딸은 요즈음 여러 과제들 때문에 나와 오랜 시간 페이스 톡을 하곤 한다. 애가 준비한 과제 내용을 보고 그런 식으로 발표하면 교수가 엉뚱하다고 지적하지 않겠냐고 말해준 적이 있다.


딸애는 여기 수업이 한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어떠한 내용을 발표하더라도 교수가 진심으로 경청을 해준다는 점이라면서, 그런 건 염려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수업과 관련해 교수에게 면담 신청을 하는 건 당연하고, 더러는 교수가 먼저 학생들에게 면담을 요청해 오기도 한다고 한다.


학기 초에는 학과장이 대학원 학생들을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다는데, 그게 일반적인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대학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잘 상상이 안 간다.


지금은 소위 청탁 금지법으로 사라졌지만 내 경우 오랫동안 학기 초에는 늘 대학원생들에게 식사 대접을 받았고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 어떤 학과는, 대학원 학생들의 학위논문 심사 통과가 끝났을 때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선생들이 식사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보긴 했는데, 그런 경우는 가물에 콩 나듯 드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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