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요한 돈 강』을 통해 떠올려 본 우크라이나 사태

by 양문규

1.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러시아는 소련(소비에트 연방)이었다. 당시 지리부도에 벨라루스는 ‘백러시아’, 우크라이나는 ‘소러시아’라고 표기돼 있었다. 이름만 놓고 볼 때 이들 나라는 원래 러시아와 한 나라인가 다른 나라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소련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이 러시아와 갈등 관계에 있는 그루지아(조지아) 출신이듯이, 스탈린을 이어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흐루쇼프는 지금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출신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내전을 치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러시아 소설들 중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몇몇의 작품이 있다. 그중 첫 번째가 196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솔로호프의 대하장편소설 『고요한 돈 강』(1928~1940)이다.


2.

주인공 그리고리는 러시아 남부 돈 강 유역의 코사크 족 농민 출신이다. 그는 배운 것은 없어도 코사크 종족의 영예와 용맹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1914년 일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과거 차르 시대의 용감한 코사크와 같이 제정 러시아 군대에 징집돼 전장으로 나가게 된다.


전쟁이 오래 끌던 중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종전을 선언하면서 그리고리는 설렘 속에 귀향을 서두른다. 그러나 그때부터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의 적군과 이에 저항하는 백군의 내전이 오랜 기간에 걸쳐 다시 시작된다.


코사크 부대들도 여기에 휩쓸려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 또는 사상적 성향에 따라 적군 또는 백군으로 나눠져 가담한다. 대체로 돈 관구 하류의 부농 출신인 ‘돈 코사크’들은 백군에, 상류의 빈농 출신들은 옛날 차르에 저항했던 ‘스텐카 라진’의 후예답게 적군에 가담한다.


부농도 빈농도 아닌 대충 중농쯤 되는 그리고리는 적군과 백군을 오가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간다. 그는 처음엔 소비에트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적군과 백군 양쪽이 공히 보여준 비인간적 행태에 환멸을 드러내게 된다.


소설은, 1920년 적군에 쫓겨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까지 밀려간 백군 진영과 그 가족들 15만 명이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군의 도움으로 영국의 함대 등을 타고 흑해를 탈출하는데서 끝이 난다. 결국 내전은 소비에트 적군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그리고리에게, 인민의 편이라 생각한 소비에트 정권이나, 그에 맞서 싸운 백군, 또 이를 도운 서방 연합군 모두 코사크 족의 행복과 평화를 빼앗아 가버린 부정적인 세력들일뿐이다. 가장 위대한 전쟁문학은 반전 문학이다. 『고요한 돈 강』은 이를 보여준다.


3.

또 다른 소설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34)는 내전 당시 우크라이나의 서부지역을 무대로 한다. 이 지역을 점령한 소비에트 적군이 독일의 침공으로 퇴각하자, 우크라이나의 우익 민족주의 군벌들은 독일을 등에 업고 세력 다툼을 벌인다.


군벌 내부의 분열을 틈타 볼셰비키가 재점령하나, 이번엔 이웃인 폴란드가 침공한다. 우크라이나는 이를테면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중심축’이다. 원래 자기 구역이라 생각하는 러시아는 물론, 서방 열강들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 이곳을 끊임없이 간섭한다.


『고요한 돈 강』의 그리고리는 “개 두 마리가 서로 물어뜯고 싸울 땐 다른 개는 결코 참견하지 않는다.”면서, 그럼에도 “연합군은 (백군에게) 장교, 탱크, 대포, 심지어 당나귀까지 실어 보낸다. 그러고 나서 놈들은 그 대가로 거액의 돈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분노한다.


현재도 우크라이나를 돕고자 서방의 무기가 들어간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핵심을 보려면, 서방언론의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증 또는 공포증)적 시각만으론 어렵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이는 6월 15일 『한겨레』에 보도됐다.


교황은 나토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도발했을 가능성을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의 잔악행위를 비판하나, 우크라 사태를 ‘절대적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즉 흑백논리로만 볼 게 아니라, 그 뿌리와 이해관계 등 복잡한 문제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맥아더 장군과 ‘맥아더 신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