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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반(反) 여성주의

채만식 소설

by 양문규

한국문학사에서 풍자하면 채만식을 떠올리게 된다. 채만식은 보통의 리얼리즘 작가와는 다르게 풍자라는 방식으로 식민지의 부정적 현실을 그 어떤 작가보다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풍자(諷刺)는 ‘빗대어 찌른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공격은 풍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인의 노여움을 산 자가 시인의 강력한 풍자에 못 이겨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무슨 과장의 말이냐 할 듯도 싶지만 “칼에 베인 상처는 잠시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 간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풍자가 억압적 권력이나 위선적인 상층계급을 향할 때는 통렬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권력이 아니거나 사회적 약자들 또는 만만한 이들을 향할 때는 조롱이나 비방으로 빠져 불쾌한 느낌을 준다.


채만식 소설의 풍자 역시 가끔은 사회적 약자 또는 장애자를 향하거나, 아니면 풍자의 방식으로 장애자들의 신체적 약점 등을 활용하고 있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그 풍자가 여자를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잦아 그 역시 개운치 않은 맛을 남긴다.


채만식의 대표작 「태평천하」(1938)는 식민지 권력에 영합해 살아가는 고리대금업자 윤직원을 풍자한다. 풍자의 내용 중에는 윤직원이 술집 여자와 외도를 하여 낳은 장애인 자식의 폄훼된 신체를 희화화시켜 조롱하는 장면이 있다.


“열다섯 살이라면서 몸뚱이는 네댓 살 박이만큼도 발육이 안 되고 그렇게 가냘픈 몸 위에 가서 큼직한 머리가 올라앉은 게 하릴없이 콩나물 같습니다. (…) 숨을 쉴 때마다 두 콧구멍에서 엿가래 같은 누런 코 줄기가 이건 바로 피스톤처럼 바쁘게 들락날락합니다.”


또 일흔두 살 윤직원이, 자신의 나이를 무려(?) 일곱 살이나 속여 열다섯 살 동기(童妓)에게 구애하는 코믹한 장면도 있다. 비록 윤직원의 노욕을 풍자하기 위한 설정이나, 소녀 기생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작가의 시선이 눈에 거슬린다.


비단 그런 여자들뿐만 아니다. 그의 풍자는 신여성에게로도 향한다.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패러디 한 작품이다. 패러디 역시 풍자의 한 방식으로, 남의 작품을 모방하되 이를 부적절한 주제에 적용시켜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인형의 집을 나와서』는 여성해방을 주장한 『인형의 집』을 묘하게 비틀어, 신여성 ‘임노라’가 집을 뛰쳐나왔을 때 막상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유별나게 강조한다. 특히 노라는 두고 나온 자식들 때문에 유독 괴로워하는데, 이를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조롱한다.


“어린애 하나 앓는다고 저렇게 날뛸 테면 애초 왜 나와? 자유해방을 했으니까 저 꼴이로구먼. (…) 요즘 여편네들이란 뱃속에 식자나 들어가면 건방져 못 써. 남편 없고 돈 없으면 아무리 날고뛰는 재조가 있어도 별 수 없어. 덮어놓고 만만하게 보는 걸.”


아마도 이 구절은 당시 이혼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나혜석을 빗댄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은 당시 친권 강제 포기로 남편에게 네 아이를 빼앗긴다. 남편은 이미 재혼한 상태였는데, 나혜석은 애들을 보고 싶은 나머지 전 남편의 집을 찾아가나 문전박대당한다.


물론 『인형의 집을 나와서』에서 집을 나온 임노라는 인쇄소 직공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이렇게 되는 과정도 의식화된 남성 노동자의 도움과 지도로 이뤄지는 등, 신여성 노라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일제 말 채만식은, 장편소설 『어머니』(1943)와 그 속편인 『여인 전기』(1944)에서 예외적으로 여자들을 우호적으로 그린다. 여주인공들은 대동아전쟁 아래 제국의 병사를 출산‧양육하고 지원하는 모성으로 당당히 나선다. 이 시기 채만식 소설은 그나마 풍자고 뭐고 다 사라진다.


채만식과 나혜석.jpg 채만식과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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