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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매력녀 ‘봉단’

by 양문규


홍명희의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1928~1940)은, 의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대놓고 말한다면 임꺽정이라는 괴수를 중심으로 한 도둑놈들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임꺽정』은 흥미롭게도 ‘봉단’이라는 여인의 사랑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홍명희는 1888년생이니 이광수보다 4년이나 연상으로 문단 최고 선배 격의 인물이다. 홍명희는 옛날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임꺽정』에 그려놓은 여인 봉단은, 내 개인적으론 한국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임꺽정』의 시작은 주인공 임꺽정이 태어나기 이전인 연산군 때로 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연산군 시절 홍문관 교리였던 이장곤이라는 이가 남쪽 거제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사약을 받을지도 모르는 등, 신변의 위험을 느끼자 유배지로부터 도망을 친다.


그는 북쪽 함경도로 올라가서 변복을 하고 백정 마을로 잠입한다. 바로 그곳에서 이장곤은 백정의 딸인 봉단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봉단과 혼인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백정의 데릴사위로 행세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 백정은 소 잡는 백정과 고리짝이나 키 따위를 만들어 팔던 고리백정으로 나뉜다. 봉단의 아버지는 고리백정이다. 양반 신분에서 졸지에 백정의 사위가 된 이장곤은 어느 날 장인의 심부름으로 키를 지고 인근 함흥 장터로 나간다.


사대부 출신 이장곤이, 자신에게는 전혀 익숙지 않은 장터에 나서게 되니 모든 것이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비키라는 소장수의 호령에 놀라 그만 자신이 지고 가던 키 부리가 시골 농군의 머리를 건드리게 됐다.


농군이 이장곤을 보고, “이 자식, 정신 차려!”라며 호령을 한다, 장곤은 미안한 뜻을 말한다는 것이 얼떨결에 “다쳤어?”라고 무심히 반말을 던진다. 농군이 대번 얼굴을 붉히며 “이놈의 새끼! 백정 놈이 반말은! 버릇을 배워라!”하며, 장곤의 뺨을 갈긴다.


장곤은 기도 막히고 슬그머니 분이 나서 그 농군을 떠다박지르니, “백정 놈이 사람을 친다.”라며 장꾼들이 모여든다. “백정의 사위 놈이 양민에게 손을 대다니 무엄하기도 짝이 없지. 도대체 세상이 망했어.”라며 사람들이 지껄이는 등 장곤은 봉변을 당한다.


장곤은 백정의 처지로 떨어져 이런저런 수모를 당하나, 사랑하는 아내 봉단에게는 혼인하고 나서 얼마 후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봉단은 장곤의 고백에 “좋은 세상이 되는 날에는 백정의 사위가 우세 거리요 망신거리지요? 그때 나를 어찌하실 생각이세요?”라고 묻는다.


이장곤은 “장래의 좋은 세상이 올는지 말는지 지금으로는 모르는 일이거니와 설혹 온다손 잡더라도 그대를 버리고 나 혼자 누릴 생각은 없소. 저기 하늘이 내려다보시오.”라고 하늘을 가리키며 대꾸한다.


그러자 봉단은 장곤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나는 하늘보다도 당신을 믿습니다.”라며 새침하던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대답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장곤에게, “나는 하늘보다도 당신을 믿는다.”는 봉단의 음전하지만 당찬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임금이 갈린 후 이장곤은 조정으로 다시 불려 가 승지 자리에 오르며, 봉단은 숙부인의 자리에 오른다. 이장곤은 실제 인물이고 백정 신부를 얻은 이야기는 야사로 전해지는데, 작가가 소설로 가져와 봉단을 임꺽정 집안의 여인네로 꾸며 놨다.


조선 사회는 양반-중인-상민-노비라는 4단계의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가령 조선 초기에는 양반 엘리트의 부가 토지 면적보다는 노비의 수로 측정됐다고 하니, 노비 같은 신분의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백정은 이런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신분이었다.


조선의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신분제라는 계급의 문제다. 봉단의 신분을 뛰어넘는 ‘신데렐라’식 사랑의 이야기는 『춘향전』같이 읽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해주나, 소설 『임꺽정』은 사랑을 구속하는 조선시대 신분과 계급제도의 엄연한 현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장곤과 백정 출신 봉단 사이에 펼쳐지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순정한 사랑은, 조선사회를 지탱한 기득권의 신분제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생명적인가를 보여주는데, 『임꺽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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