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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부부 싸움

by 양문규

『임꺽정』의 작자 홍명희는 1882년 생으로 조선 시대 마지막 명문 사대부가 출신이다. 증조부, 조부 등이 판서, 참판을 지낸 최상층 가문으로, 한일합방 당시 금산 군수였던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나라가 망하자 관사의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 자결을 했다.


홍명희는 당연히 전통 조선과 접맥 돼있고, 사상적으로 유교의 뿌리를 가진 인물이다. 13세의 나이에 조혼하고 16세에 첫아들을 낳는 등 구가족의 틀 안에 놓여 있던 사람이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 등 서양 사상들을 받아들임에 주저함이 없었고 이를 주체적으로 소화해낸다.


그는 페미니즘의 ‘페’ 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일 터이지만, 『임꺽정』에서 가물에 콩 나듯 등장하는 몇 명의 여성 인물들을,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으로 가부장주의가 아닌 여성의 관점에서 그려낸다.


가령 『임꺽정』은 조선 시대의 기생 황진이를 청순가련형의 여인이 아니라 ‘걸 크러시’적 인물로 그려 흥미를 끈다. 단 그녀가 작품 속에서 카메오로 출연하기에 중심인물로 얘기할 수는 없고, 여기서는 도둑의 괴수인 ‘임꺽정’의 아내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인데, 아내 ‘운총’은 백두산으로 도망쳐 살던 관노비의 자식이다. 꺽정은 백두산서 그녀를 만나는데, 운총네는 화전을 일구고 짐승 가죽으로 곡식과 옷감을 바꿔 살아가는 이들이다. 꺽정은 운총과 어울려 사냥을 다니다 서로 눈이 맞아 장래를 약속하게 된다.


꺽정: 너 내게로 시집 오려냐?

운총: 시집가면 무엇 하니?

꺽정: 아들도 낳고 딸도 낳지. 너의 엄마가 너의 아비에게 시집을 온 까닭에 너를 낳고 천왕동이(운총의 남동생)도 난 것이다.

운총: 천왕동이 같은 아들 하나 나볼까. 그래 내가 시집갈 테다.


운총이 어서 시집가게 하라고 조르자, 꺽정은 운총을 안아 무릎 위에 올려 앉히고 젖가슴에 손을 얹어 본다. 어린아이 같이 철이 나지 아니했지만, 나이가 있어서 젖가슴이 생길 뿐이 아니라 꼭지까지 제법 생긴 것을 느낀다.


이에 운총은 “이것이 시집가는 게냐?”라고 묻자, 꺽정은 또다시 한번 웃는다. 운총은 남동생을 낳을 때 자기 부모가 천왕당에 가서 축원하는 것을 보았다면서 꺽정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축원하자고 제안한다. 천왕당에서 나온 후 꺽정은 운총을 번쩍 안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 문학사에서 그 어느 누가 이런 야생과 자연의 사랑을 그린 자가 있을까? 『임꺽정』은 그런 점에서 파격적인데 이러한 사랑은 신분, 계급 또는 제도로 이뤄지는 문명세계와 사회의 질서에 대해 한번쯤은 의문을 던져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화적의 괴수가 된 꺽정은 언젠가 잠시 소굴을 떠나 서울로 가서 첩 놀음을 벌인다. 꺽정의 아내 ‘백손 어머니’는 이 일로 상경하여 남편과 대판 싸움을 벌인다. 부부의 싸움은 몸싸움으로까지 번진다.


우악스러운 꺽정의 발길질에 백손 어머니는 앞 정강이가 부러져 나가기까지 한다. 백손 어머니는 이에 전혀 굴하지 않고 꺽정에게 “나 몰래 계집질하는 걸 알고 가만히 있으니까 … 내가 딴 서방을 몰래 얻으면 가만히 있겠나 생각 좀 해보지”라고 따진다.


꺽정은 이에 “계집년 하고 사내대장부 하고 같으냐?”라고 반문한다. 백손 어머니는 “사내나 여편네나 사람은 매한가지”라고 대꾸한다. 꺽정은 “저게 소견 없는 계집년의 생각이야. 그래 같은 사람이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고 종이나 상전이냐 마찬가지냐?”라고 되묻는다.


백손 어머니는 “아이에 머슴애도 있고, 종에 사내종도 있지 계집애만 아이고 계집종만 종인가?” 그러면서 “사내가 어른이면 계집도 어른인 것이고, 사내가 상전이면 계집도 상전이 되는 것이지.”라고 한다. 그러자 첩을 꺽정에게 주선해준 한온이라는 자가 껴들어 꺽정을 두둔한다.


“저도 사내니까 선생님(꺽정) 편을 들어 말씀 한마디 하겠습니다. 아이와 여자를 한데 쳐서 ‘아녀자’란 말은 있어도 ‘아남자’란 말은 없지 않습니까? 또 여편네를 문서 없는 종이라 하지만 사내 더러야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그러자 백손 어머니는 둘 다 한 통속이라 쏘아붙인다.


꺽정은 결국 서울서 첩들을 정리하고 도둑의 소굴로 돌아간다. 백손 어머니는, 꺽정의 첩 놀음에, “아버지가 장가를 자꾸 드시니 나도 장가를 들고 싶다”라고 비아냥대는 아들 백손을 앞세워, 물고 뜯고 한판 싸움을 벌인 것인데 이는 한국 소설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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