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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속의 신여성과 구식 여인

by 양문규

식민지 시기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들을 일컬어 신여성이라 부른다. 신여성은 우리 근대 소설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스스로가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은 일찍이 자신을 모델로 한 자전적 소설 「경희」(1918)를 발표하기도 했다.


남성 작가가 신여성을 등장인물로 삼을 경우, 대부분 이들을 부정적으로 그린다. 당장 김동인과 염상섭 등이 나혜석을 모델로 몇몇의 작품들을 썼는데, 그들은 그녀에 관한 여러 소문들을 서사화하여 신여성이라는 존재를 조롱하고 거부했다.


그런데 신여성은 어떤 식으로나마 소설에서 등장하나, 구식 여인들은 아예 등장조차 못했다. 설사 등장하더라도 익명으로 처리되기 일쑤다. 김우진과 신여성 윤심덕의 동반 자살이 인구에 회자됐을지언정, 김우진의 본처는 관심 밖의 인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염상섭의 「만세전」(1923)에서 동경유학생 주인공은 조혼한 아내가 죽게 됐다는 전보를 일본서 받는다. 주인공은 귀국을 하면서 아내에 대한 약간의 동정심만 있을 뿐 애정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한다. 오히려 일본서 사귄 카페 여급에 마음을 더 쓸 뿐이다.


자유연애를 동경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 지식인 남성과 신여성은 소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러한 남성과 조혼을 해 불행했던 구식 여성들은 소설 안에서 어떠한 존재감도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 프로작가였던 이기영의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1925)은 그런 점에서 예외적이다. 주인공 성호는 프롤레타리아로 영락한 지식인 남성이다. 그는 주로 가난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만 조혼한 구식 여성과의 문제로도 갈등을 겪는다.


성호가 아내와 혼인한 것은 그가 14살 되던 해이다. 그 해는 할머니가 환갑을 맞던 경사로운 해여서 집안에서는 손자며느리를 보는 경사까지 아울러 보자는 성호 부친의 효성으로 그런 혼인이 이뤄진 것이다.


성호는 자신을, “속죄제에 바치는 어린양 모양으로 할머니의 환갑잔치에 희생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성호 역시 자유연애 소설의 주인공들과 같이 구식 여자인 자기 아내를 혐오하며 신여성과 연애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단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연애 문제로 방황하는 지식인 남성의 처지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조혼의 또 다른 희생자인 구식 여인에 대한 관심을 동일하게 기울여 사태를 균형 있게 바라본다.


그래서 당시 자유연애를 부르짖던 지식인들의 행동이 철부지 같고 이기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성호는 구식 아내에게 이혼하고 개가할 것을 권하나, 아내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우리 소설사에서 이런 여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내가 왜 화냥년인가? 기생 갈보 년인가? 부모가 한번 정해준 남편의 눈이 멀뚱멀뚱하게 살았는데 미쳤다고 시집을 또 가? 아이쿠! 망측한 소리도 … 내외 싸움은 칼로 물 치기라고 예전 사람이 여북 잘 알고 말했겠소.”


“평생을 같이 살자면 가끔 싸움도 하는 게지. 아! 싸움하는 족족 이혼을 하다가는 밤낮 이혼만 하다 말게 자식까지나 나 놓고 인제 와서 무슨 딴 소리요. 나를 그 전 처녀로 도로 만들어주오! 그러면 애 얼씨구나 하고 시집을 갈 제. 당신이 나를 헌 계집을 만들어 놓았으니


아내는 남편의 말을 ‘미친 소리’라고 일갈한다. 아내는 시집올 16살의 나이 때만 해도 마치 ‘소담한 과실’과 같은 여자였다. 그러나 자식들을 낳고 이후 영양부족, 산고, 노역, 가난에 찌들어 머리는 빠져서 ‘가르마가 신작로같이 타진’ 볼품없는 여인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1917)은 신여성과 구식 여인 사이에서 자유연애를 그린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무정』을 연재할 당시, 이광수는 신여성 의사 허영숙과 결혼하기 위해, 이미 자신의 아들을 낳은 본처 백혜순과의 이혼 문제로 머리가 한참 복잡했다.


그래서 『무정』은 이광수가 자신의 이혼에 대한 일종의 합리화를 꾀하기 위해 쓴 소설이 아닌가라는 추측도 있다. 작품 속 주인공 ‘리형식’이 구시대 여인 기생 ‘박영채’를 쉽게 뿌리치지 못했던 태도는, 실제 이광수가 본처에 대해 미안해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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