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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극장에서의 부킹

by 양문규

개화기 시대에 등장한 ‘신소설’은 대개가 문명개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을 주요한 주제로 삼는다. 그런데 「산천초목」(1912년)이라는 제목의 신소설은 ‘강릉집’이라는 여인의 불륜을 소재로 삼고 있어 자못 이색적이다.


강릉집은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늙은 영감의 첩으로 들어가 사랑 없는 첩살이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연)극장 구경을 갔다가 방탕한 젊은 귀족 이시종을 만나면서 바람이 난다.


불륜의 발단이 되는 장소는 다름 아닌 극장이다. 당시 극장들에선 주로 판소리 창극을 공연했는데, 그중 단성사 극장은 아직까지 남아 영화 상영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산천초목」의 무대가 되는 극장은 탑골 공원 서쪽 편에 있던 사동의 연흥사다.


이 소설에는 극장서 상연되는 연극 내용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고, 대신 극장 안 풍속도를 실감 나게 그린다. 당시 극장 구경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동백 같은 명창의 공연들도 있었지만, 남자들의 경우 부인석에 자리한 ‘갈보’들 구경을 실컷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봉꾼 이시종도 강릉집을 유혹하기 위해 뚜쟁이를 시켜 그녀를 극장으로 유인한다. 이시종은 강릉집을 잘 건너다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는, 극장 ‘뽀이’(사환)를 시켜 그녀에게 가비(커피) 차를 보낸다. “일기도 추운데 한 컵씩 마십사 여쭈라고” 전하면서 소위 ‘작업’을 건다.


그 밖에도 계속 뽀이를 시켜 궐련과 서양과자를 보내 환심을 사는데, 결국 이시종의 애정 공세에 강릉집은 넘어간다. 강릉집은 이시종과 함께 사랑의 출분까지 벌이나 이시종의 사랑은 어느덧 식어버리고 결국엔 늙은 남편에게 붙들려 와 집에 갇혀 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신소설의 여주인공들이 대개 정절을 지킴으로써 행복한 결말을 성취하는 것과 달리, 강릉댁을 통해서는 성적 욕구에서 소외된 젊은 여인의 초라한 모습을 어떠한 동정이나 연민 없이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산천초목」은 근대소설같이 느껴지는 일면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작품도 신소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건, 작가는 궁극적으로 정절이나 효와 같은 기존의 가치가 ‘성적 욕망’과 ‘재미’로 바뀌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탄식과 함께 훈계와 설교를 마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해는 1912년이나, 이미 1910년 한일합방 직전 『대한민보』라는 신문에 먼저 연재되었다. 이 작품에 나타난 극장의 번성 등 당대 시정세태의 변화는 이 땅에 이미 일제의 경제적 침투와 함께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해가 지고 한양도성의 동산(東山) 격인 낙산 허리에 달이 떠오르면, 연흥사 극장에서 사람들 불러 모으는 나팔, 장구, 소고, 징, 제금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극장 앞길로는 치마 쓴 계집, 인력거 탄 계집, 양복 입은 자들이 패거리를 이뤄 모여든다.


그중에는 옷을 빼입고 방망이 같은 여송연(시가)을 뻑뻑 빨면서 보석시계를 내여 계속 보며 극장으로 오는 이시종 같은 방탕한 양반 자식들이 있다. 이시종은 극장서 유혹한 여인네들을 집에다가 불러 모아 놓고는 ‘삼편주’(샴페인 술)를 마시면서 놀아난다.


작가는, 도망간 첩 강릉댁을 찾느라 애쓰는 남편 박 참령을 향해서는 일본말을 써가면서 비웃는다. “애를 쓴들 벌써 사요나라를 부른 강릉집이 들어올 리가 있으리오.”라고 서술하는데 이미 시정에 일본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짐작케 한다.


「산천초목」이 발표된 시기는 망국 직전이나, 작품에 그려진 시정세태를 보노라면, 한양의 일상은 흥청망청 대고 있었다. 비난할 바는 아니지만 향후 암울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한쪽에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즐겁고 평범한 일상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산천초목.png 「산천초목」의 책 표지. 그림 안의 건물은 연흥사 극장이고, 좌측에 매표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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