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대학으로 발령을 받아간 때는 1987년 9월이었다. 당시는 군부독재의 잔재로 학년마다 지도교수가 배정돼 형식적이나마 학생의 동태를 살피고 지도하는 업무도 있었다. 그런데 지역대학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사제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기여(?)했다.
부임하자마자 과대표가 개강 모임에 참석해 주십사 찾아왔다. 선생이 학생들 행사에 끼면 분위기나 깰 텐데, 여기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통으로 된 유리창 너머로 경포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카페 겸 식당서 모임을 가졌다.
피서객들의 발자국만 휑뎅그렁하게 남은 백사장 너머 달이 떠오른 경포 해수욕장은 또 다른 분위기였다. 10월에 들어서는 과대표가 학생들 엠티에 참석해 주십사 하며 또다시 찾아왔다. 행선지를 물어보니 설악산이었다.
내설악의 오색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그날 오후 대청봉까지 올라 그곳 산장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외설악 공원으로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내 경우 학부시절에는 서울 인근의 양수리나 강촌 정도를 가는 게 엠티 행사의 전부였는데, 이 지역의 학생들은 역시 스케일이 달랐다.
학생들이 김밥을 많이 준비해와 과식을 하는 바람에 초반에 산을 오를 때 꽤 힘들었다. 오색에서 출발하는 길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꽤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파른 고비를 지나고 나니, 당시 ‘설악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는데 멀리서부터 단풍이 내려오고 있었다.
학생들과 쉬면서 서정주의 「푸르른 날」을 낭송했다. 설악산 골짝으로 내려온 단풍은, “저기 저기 저, 가을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는 구절과 딱 들어맞았다. ‘초록이 지쳐’라는 시구는 서정주의 초기 『화사집』(1941년) 시절의 분방했던 열정을 생각나게 한다.
서정주는 식민지 시절 유치환,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1936년)이라는 동인지를 결성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 마을의 족장이라 칭했다. 여기서 부락은 단순히 마을이 아니라 일본의 ‘부락민’ 같은 천민(백정) 마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정주는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도 남아 양반 행세하는 무리들에게 심한 반발을 느낀 나머지, “나는 너희들 고루한 양반이 아니라 산 ‘쌍놈’의 족속”임을 자처한다. 그래서 「자화상」에서는 “에비는 종이었다.”라는 도전적인 신상 고백으로 사회를 조소하고 공격한다.
「화사」에서는 “아름다운 뱀”이라고 했다가도, “을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면서 소스라친다. 「문둥이」에선 “해와 하늘빛”이 서러운 문둥이가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기도 한다.
그의 『화사집』 시절 시들을 보면 저주받은 식민지 상황서 다시 저주받은 시인임을 자임하며 사회적 이단아와도 같은 반항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후 식민지 말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노골적인 친일의 시를 쓰는데 이러한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은 해방 후 계속 이어진다.
해방 후 「푸르른 날」이 실린 『귀촉도』(1948년) 시집에 오면, 이전의 갈등과 분열이나 모순이 아닌 해탈과 화해가 이뤄진다. 그래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멋진 구절을 읊기는 하나, 이전의 갈등이나 모순에서 오는 긴장감은 사라진다.
실제 해방 뒤 서정주는 김동리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를 주도하며 우익의 전위에 선다. 이승만에게 전기를 써 바치기도 하고 한국전쟁 후에는 냉전 체제에 편승해 남한 사회의 문학적 권력이 된다. 80년 광주 때는 전두환에게 송시를 바치기도 한다.
위대한 신념을 가진 자가 꼭 위대한 시인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신념이 올곧지 않은 자가 위대한 시인이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해방 후 서정주 시들은 안정되고 원숙해지는 반면, 타성에 빠지며 시적 긴장도 떨어진다. 「푸르른 날」은 바로 그 지점에 놓인 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