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을 받았다기보다는 내 나름 인상적인 소설이었음에도, 학생들에게는 끝내 강의할 기회는 없었던 작품들이 몇 있다. 다소 신파조가 깃든 이태준의 <그림자>(1929년)라는 단편소설도 그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무슨 문학사적 의미가 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적 향기가 그윽하거나 아니면 인생이나 도덕의 측면에서 특별히 전할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흔하디 흔한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인데, 처음 읽었을 땐 그래도 마음 한 편이 짠했던 기억이 있다.
동경 유학생인 ‘나’는. 한 오 년 전 방학이 돼 조선에 나왔다가 친구들과 함께 요릿집 명월관을 가서 소련(小蓮)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인상적이었던 건, 그녀가 흰모시저고리 흰모시치마에 머리엔 쓸쓸한 흑각비녀를 한 소복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나’가 소련이 소복한 이유를 물으니 양어머니의 거상이라 하였다. 친부모는 계시냐고 다시 물으니 그는 머뭇거리며 얼른 대답하지 않다가, “다 없으셨어요 … 왜 선생님은 유쾌하게 놀지 않으시고.”라며, 친구 기생의 장구를 뺏아 안고 분위기를 바꾸고자 했다.
술자리서 사랑 이야기판이 돌면서, 한 기생은 남자는 “사람이 제일이야. 당사자 하나만 마음에 들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련은 남자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돈이 있어야지.”라면서 부잣집 친구의 담뱃불을 붙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벼운 질투마저 느낀다.
그러나 소련은 다른 이가 눈치채지 않게 걸린 양복서 만년필을 하나 뽑아, “선생님, 이런 글자 아세요.” 하고 ‘나’의 손바닥을 자기 무릎으로 이끈다. 그가 쓴 글자는 어려운 한자가 아니었다. 나의 손바닥에는 “서린동 ××번지”라고 씌어 있었다. 아, 이런 여자 한번 사귀고 싶다!
이튿날 아침 ‘나’는 서린동 그녀의 오죽잖은 집을 찾아갔으나 결국은 그 집 문 안을 들어서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다시 동경으로 갔다가 일 년 후 국일관에서 소련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후 소련과 ‘나’ 사이 남모르는 만남이 빈번해진다. ‘나’는 돈이 없는 학생 신분인 탓에 남과 같이 버젓이 소련을 보고 싶은 대로 요리점에서 불러 보지 못하고, 기숙하고 있는 삼청동 주인집에서 밤 두 시 세시까지 일을 마치고 오는 그녀를 기다리는 얼마간의 생활이 계속된다.
어느 날 소련의 언니뻘 되는 기생 명옥이 사오 세 된 계집애를 데리고 삼청동 집을 찾는다. 소련 얘기로는, 명옥 언니에게는 사랑했던 남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남자는 언니가 아이가 달린 여자인 줄을 미처 몰랐고, 결국은 그 아이 때문에 사랑이 틀어졌다고 한다.
‘나’는 그 남자를 속 좁다 나무랄 수만 없는 게, 기생생활 한 이에게서 처녀를 찾는 건 아니나 만일 자식이 있다면 저게 남의 자식이거니라는 생각이 볼 때마다 날 게고, 더구나 자기 자식을 낳으면 문제가 될 거라 얘기한다. 계집애를 고아원에 맡겼어야 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소련은 내일 다시 오마하고 삼청동 집을 나섰는데 이후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소련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만일 내 가슴속에 당신의 그림자가 없었던들 나는 벌써 이 땅 위에서 떠난 지가 오랠 것입니다.”
명옥이 데리고 온 계집애는 실은 명옥이 딸이 아니라 소련의 딸이었다. 소련이 나에게 한 이야기는 명옥이가 아니라 소련 자신의 신세타령이었다. “만일 소련이 그때 자기 딸인 것을 솔직하게 말하여 주었던들 …” 나는 생각하지만 그나저나 결과는 똑같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오겠다며 마치 장 보러 가는 아내처럼 집을 나섰던 소련은 어언 삼 년이 지나 청량리 역 열차서 만난다. 추석을 쇠러 친정집으로 가는 아내를 전송하러 나온 나는 아내 앞자리에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자는 부인과 그에 기대고 자는 계집애를 보고 소련 모녀임을 알아차린다.
추석 전날이지만 내일 밤에 뜰 달이 내리는 듯이 대낮같이 밝은 밤이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달밤에 나뭇잎들은 가지에서 흩어지는 슬픔도 있다. 또 이것을 자지 않고 길 위에서 굴리고 있는 심술궂은 바람도 있다. 나는 모두가 한낱 그림자로구나 하는 애상에 잠긴다.
“시에 대한 가장 진실된 설명은 바로 그 시 자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어줍지 않게 줄거리를 요약해 작품을 망쳐 놓은 것인지, 아니면 애초 작품 자체가 별 볼 일 없는 것인지, 어쨌든 이 작품은 다른 한국문학 연구자들의 입에도 잘 오르내리는 작품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신파조이고, 북쪽 작가들 식으로 얘기한다면 ‘소시민적 센티멘털리즘’에 빠진 작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소시민주의’ 작가 이태준은 해방 직후 북쪽으로 간다. 그래서 그를 ‘월북 작가’라고도 부르나 그의 월북에는 남모를 좀 복잡한 사연이 있다.
이태준이 북으로 올라간 시기는 1946년 7월 상순이다. 당시 그는 남쪽을 대표해 북한 지역의 문학가들과 함께 소련의 문화사절로 가기로 돼 있었다. 사실 그가 북한으로 갈 때에는 거기에 머물려한 것은 아니고, 소련 방문을 마치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소련을 방문하고, 10월 초 북한으로 왔을 때, 남한서는 10월 대구 봉기로 좌익 탄압이 본격화되고 그가 남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됐다. 이후 북한에 남았던 이태준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숙청되는데 결국 그는 북쪽서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