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입학하니 국어교과서에 김동인, 현진건, 나도향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등장했다. 중학교 첫여름방학에 이들의 소설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민중서관서 나온 한국문학전집으로 읽었는데, 그때 이들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이란 이런 건가 생각하며 기분이 좀 우울했다.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이들 소설 대부분은 가난의 불행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설이란 의당 가난을 그리는 것으로 알았고, 소설을 쓰고 싶다면 소재를 얻기 위해서라도 가난한 친구들과 어울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1920년대 가난을 가장 핍진하게 그린 작가는 위의 작가들 말고 최서해라는 이가 있다. 서해는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써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소설이 된다는 부러움 아닌 부러움을 산 작가다.
1920년대 작가들 대부분이 동경 유학을 가거나 동인지 출신의 작가였던 것과는 달리, 서해는 보통학교를 삼 년 정도 다니다가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간도, 만주에서 방랑생활을 하며 노동자, 벌목꾼, 두부장수 등 온갖 험하고 궂은일을 전전했다.
일생을 통해 네 번의 결혼을 했는데 두 번째 여자는 가난으로 사별하고, 세 번째 여자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도망갔다. 서해 자신도 결국 지병인 위 협착증으로 서른을 간신히 넘은 해인 1932년 사망했다.
서해의 소설은 이런 체험이 몰고 온 불가피한 절박성으로 가난의 생태에 대한 밀도 높은 현실감 있는 묘사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 상당수가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고, 그래서 그의 신변체험을 담은 수필조차도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는 학생들에게 최서해를 가르칠 때는 늘 <탈출기>(1925)의 그 유명한 장면을 상기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나’가 간도까지 이주해 와 살아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건만 결국은 ‘탈가(脫家)’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친구에게 편지글로 써 보내는 형식을 갖는다.
어느 날 ‘나’가 이틀이나 굶고 일자리를 찾다가 집으로 들어와 보니 배가 남산만 해진 만삭의 아내가 무엇을 먹다가 깜짝 놀라 얼른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남편은 무엇이기에 어머니와 자신 몰래 먹고 있나 아내를 의심하며 원망도 하고 밉게도 생각한다.
아궁이를 뒤져보니 그것은 귤껍질이었다. 길바닥에 내던진 것을 주워 와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일층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건, 아내보다는 자식들 얘기가 나올 때다. <백금>(1926)이라는 소설에서다.
‘백금’은 주인공인 ‘나’의 딸 이름이다. 백금이는 ‘나’가 스물한 살 때 간도로 이주해 가서 낳은 자식이다. ‘나’는 백금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친구와 이렇게 말하고 웃은 일도 있다. “여편네는 남의 것이 이쁘고, 자식은 제 자식이 이쁘다는 말이 일리는 있어! 허허허!”
그러나 가난에 몰리자 아내는 도망을 가고 ‘나’ 역시 암만 해도 집에서 굶고만 있을 수 없어 백금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일을 찾아 집을 떠난다. 어느 날 친척이 백금이의 죽은 소식을 전한다.
“백금이는 죽을 때 약을 안 먹으려고 떼를 쓰다가, 백금아 이 약을 먹고 아버지 있는 데로 가자! 하니까 벌떡 일어나서 꿀꺽꿀꺽 마시더래요!” 서해는 이런 자식들을 세상에 두고 그 자신도 서른의 젊은 나이에 죽는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서해를 추모하는 시를 썼다.
“온종일 줄줄 내리는 비는 /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 어린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잘대네. /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이 감아집니까? …”
장지(葬地)에서 ‘토끼’ 같이 뛰놀던 서해의 아들은 해방 후 북쪽으로 갔고, 북에서 최서해 문학의 선양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나 보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최서해 문학의 가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의 문학의 또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가령 최서해 문학은 가난의 무력함을 그리는 것을 넘어서 가난을 뚫고 새로운 힘을 발견하고 그러한 곳에서 생의 기쁨과 충동을 발견하려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북한은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홍염>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