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인천에는 유난히 미군부대가 많았다. 인천항이 주한미군의 한반도 출입구이자 병력과 물자를 전국의 미군기지로 뿌리는 심장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의 한진그룹도 다름 아닌 이 인천부두서 몇 대의 트럭으로 미군 군수물자를 수송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인천 출신으로 배인철이라는 시인이 있다. 해방 직후 잠깐 활동을 하다가 비명에 갔다. 서울 남산서 여대생과 데이트를 하던 중 암살을 당한다. 애정 관련 스캔들은 아니고 해방정국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에 의도치 않게 엮여 비극적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부모님조차 이 사건을 알 정도로 배인철은 인천에서 유명한 이다. 그는 많은 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특이하게도 그의 시는 흑인의 운명을 노래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배인철은 인천에 주둔한 미군들 특히 흑인병사들과 많은 교제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전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그는 원래부터 리처드 라이트 등의 흑인문학에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흑인 시를 쓰게 된 건 아무래도 인천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흑인병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배인철과 친분이 있었던 모더니즘 시인 김광균은, 그와는 흑인문학 이야기를 한 것 빼놓고는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했다. 언젠가 김광균이 인천에 갔을 때 그를 쫓아 부둣가의 미군 캠프를 가서 흑인 병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떠들었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김광균은 흑인병사들과 이야기 끝에 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 얘기를 꺼냈는데, 흑인병사들은 “맥아더하고 우리하고 뭔 상관이냐?”는 핀잔이 돌아왔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배인철은 자신의 시에서 흑인 병사들을 소재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차세계대전 당시 백만에 달하는 흑인 병사가 참전한다. 이들은 대개 미숙련 노동인 포탄, 화물작업 등에 동원된다. 그들은 그나마 전쟁을 통해 미국시민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다시 미국사회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결코 불평등과 차별의 굴레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당시 조선 역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났지만 해방군이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의 지배를 다시 받게 된 상황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면서 이 시기 지식인들 대부분은 복잡한 감정을 가졌으리라.
배인철의 미국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었던 것 같다.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국가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다. 그는 미국 유학을 가고도 싶어 했고, 농담 비슷하게 뉴욕에 가서 할렘에다 비어홀이나 하나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대전 후 미군정 아래 조선현실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는 미국사회서 흑인들이 처한 처지와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동병상련을 느꼈다고나 할까? 흑인의 운명을 그린 배인철 시는 해방 후 남한현실이 미국 내 흑인문제와 동일한 맥락 속에 있음을 그린다.
그의 시에는 존슨, 브라운, 테일러 등의 흑인병사들이 등장한다. 시인은 그들과 추운 겨울밤 조그만 온돌방에서 ‘코리안 위스키’(소주)로 따스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떠들고 노래하면서, 미국 내 이등시민으로서의 흑인과 온 세계의 약소민족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배인철 시에는, 흑인병사들이 다시 자신들의 고향 나라 미국으로 귀환하게 됐을 때, 그들과 작별하는 아쉬움보다는 그들에게 닥칠 새로운 박해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려진다. 배인철의 이러한 걱정은 당시 미국사회서 실제 일어났던 각종의 사건들을 볼 때 결코 기우는 아니었다.
28세의 흑인병사 ‘아이작 우더드’는 남태평양 뉴기니 점령 전투의 포화 속에서 용기 있게 싸워 훈장을 받고 1946년 2월 귀국을 한다. 4년 전 출병 후 처음으로 아내와 만날 순간을 고대하면서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집에 거의 다가올 저녁 무렵, 우더드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문제로 버스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버스를 태워주지 않으려는 기사에게 사람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기사는 곧 순찰차의 경찰서장과 경찰관을 불러 우더드가 소란을 피웠다고 이른다.
우더드는 자신이 버스 기사와 언쟁한 사연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장이 경찰봉을 꺼내 머리를 때리고, 연행 과정에서 계속 구타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눈이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는다. 우더드가 가족과 재회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두 달이 더 걸렸다.
트루먼 대통령이 조사를 지시한 후 과도한 폭력 혐의로 기소된 서장은,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정당방위로 30분 만에 무죄를 선고받는다. 당시 미국사회 안에서 우더드의 억울함을 공개적으로 호소한 유일한 지식인은 장애인 인권운동가 헬렌 켈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