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서정시는 1920년대에 정립된다. 그 중심에 이상화, 김소월, 한용운이 있다. 그중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1923)는 앞 시대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에로스적 욕망을 형상화해 근대시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나의 침실로」에서 시인이 애타게 기다리는 ‘마돈나’는 “수밀도(水蜜桃)”의 젖가슴을 가진 여인이다. 수밀도는 물이 많고 달콤한 복숭아다. 수업할 당시 수밀도를 설명코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도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오해(?)를 살 만큼 열심을 다해 설명했다.
시인은 마돈나를 향해 그 “수밀도의 가슴”에 “이슬이 맺히도록” 달려오라고 노래한다. 가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숨 가쁘게 달려오라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표현이다. 그 시대에 이상화는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해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귀부인의 도톰한 입술을 복숭아에 비유한다. 괴테도 만만치 않은 게, 복숭아 같은 입술을 술잔처럼 빨고 싶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여인의 젖가슴을 겉이 투명하고 속은 살과 물이 많은 수밀도에 빗댄 이상화의 천재적 비유에는 못 미친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표현은, 그의 불세출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에서도 이어진다. 이 시는 잘 알다시피 정치성이 농후한 시다. 실제로 이 시는 『개벽』지에 실렸다가 식민당국으로부터 부분 검열이 아니라 통째로 압수당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이 시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검열받기 전 잡지의 일부를 독자에게 미리 우송했기 때문이다. 물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니까 믿을 만한 독자들에게만 보냈다. 이 정치적인 시 역시 여성적이고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은 남의 ‘땅’이지만 빼앗기기 전에는 ‘들’이었다. '땅’이 싸늘한 남성의 언어라면, ‘들’은 정감 어린 여성의 언어다. 비록 ‘땅’은 빼앗겼지만, ‘들’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봄이 찾아왔다. 시인은 여인의 들에 나서, 여인의 가르마 타놓은 것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인 양 걸어간다.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반갑게 웃고, 보리밭에서는 여인의 삼단 같은 머릿결이 흔들린다. 논의 도랑물은 여인이 젖먹이 달래는 소리를 하듯이 흘러가고, 김매던 여인의 까만 머릿결에서는 아주까리기름의 향내가 난다.
시인은 드디어 손에 호미를 쥐어달라며, 여인의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싶다고 한다. 여기서는 수밀도의 가슴이, 살진 젖가슴의 흙으로 바뀐다. 감각적 이미지의 절정이다.
이상화는 남근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제도와 법의 세계인 식민지 현실에 맞서, 여성적이고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어로 저항한다. 남성적 언어가 갈등과 폭력을 낳는 것이라면, 여성적 언어는 공존과 화해를 지향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구절은, 평소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주인공이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라고 독백하는 부분이다.
식사를 거부하는 주인공은 점점 야위어 가면서, “이 둥근 가슴이.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하며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간다. 둥근 가슴! 그렇다! 이는 무엇을 찌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상화나 한강의 ‘젖가슴’은, 이 세상의 폭력, 그것은 식민지 따위의 정치적‧군사적 폭력일 수도 있고, 가부장적 폭력이기도 하고, 자본주의 또는 문명의 물신적 폭력이기도 한데, 이들의 폭력과 억압의 굴레에 맞서서 파멸이 아닌 생성과 평화를 지향코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