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슈킨은 러시아의 대문호다. 모스크바 관광지 여기저기서 푸슈킨이라는 이름과 마주치게 된다. 모스크바에는 푸슈킨 광장이 있고, 황금빛 코플라를 얹은 모스크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앞 쪽으론 그에 못잖은 거대한 ‘푸슈킨’ 국립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를 나오는 길에는 푸슈킨 부부 동상도 있고, 또 푸슈킨이 불과 몇 달밖에 안 살았다는 그의 신혼집도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실제 푸슈킨은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다. 2011년에는 푸슈킨의 탄생일인 6월 6일이 ‘러시아의 날’로 지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 같이 한국문학을 공부한 이에게는 그의 문학의 어떤 점이 러시아 문학사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사실 내가 읽은 푸슈킨의 작품은 손꼽아 몇 개가 안 된다. 그중엔 푸슈킨의 대표작인 『예브게니 오네긴』(1823~31)이 있다.
이 작품이 나름 친숙한 건, 작품 자체보다는 차이코프스키가 이 작품으로 오페라를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역시 그 오페라 전체를 다 본 건 아니고, 그 오페라에 나오는 화려한 ‘폴로네즈’가 자주 FM 방송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슈킨뿐 아니라 러시아 문학 전체의 손꼽히는 명작임에도, 운문으로 된 소설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문학형식이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단 푸슈킨의 『대위의 딸』은 흥미롭게 읽었다. 이 작품은 전문작가가 아닌 마치 이야기꾼이 얘기하듯 그려진다.
『대위의 딸』(1836)의 주인공은 젊은 철부지 귀족 ‘표트르 그리뇨프’다. 그가 고향을 떠나 군에 입대해서 장교로 부임하게 되는 곳이 러시아 남서부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한 오렌부르크 요새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상관인 대위의 가족을 만나고 대위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이 작품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그녀와의 결혼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그냥 이런 로맨스 이야기이기만 했다면 시시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펼쳐지는 오렌부르크라는 곳은 18세기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 사건 중 하나인 푸가초프의 농민반란이 일어난 곳이다.
이 봉기에서 수백 명의 귀족이 목숨을 잃는다. 이후 러시아는 이런 봉기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떤다. 그리하여 푸가초프의 난을 겪은 후, 러시아는 그와 같은 난리에 철저히 대비하여 좀 더 공고히 차르중심의 절대독재 권력을 구축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1863~67) 에필로그에서 러시아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서 승리했음에도, 알렉산더 1세 등 지배층의 폭정이 가져올 파국을 경고한다. 그래서 이를 못 막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푸가초프가 내 아이들과 자네 아이들을 죽이러 올 것”이라며 겁(?)을 준다.
푸가초프는 러시아 지배계급에게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대위의 딸』에서는 허구적 설정이기는 하나, 주인공 그리뇨프와 무시무시한 푸가초프의 운명적 만남이 펼쳐진다. 사실 푸슈킨이 얘기하고 싶은 것도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위의 딸』에서 푸가초프는 유머러스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푸가초프에게 우연찮게 베푼 작은 은혜로, 폭도들에게 붙잡혀 와서도 목숨을 구하고 오히려 그들 속에서 푸가초프라는 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폭도들은 푸가초프가 대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공대하는 눈치가 없다. 저마다 자기 자랑을 해대며 의견을 개진했고 또 자유롭게 푸가초프를 반박했다. 그래서 그리뇨프는 푸가초프에게 과연 부하들을 이끌고 모스크바까지 진격해 갈 의사는 있는지를 묻는다.
푸가초프는 “나도 몰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내 부하 놈들은 잘난 척만 하고 게다가 모두 도적놈들 아닌가. 그래서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어. 전세가 역전되면 제 목숨 살리겠다고 당장에 내 모가지를 갖다 바칠 걸세.”라고 푸념을 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폭도들이 구슬픈 뱃사공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반란에 실패하면 처형당할 운명에 처한 사내들이 부르는 교수대 민요에 기이한 감동을 받고 한편으론 이 모든 것이 시적인 공포가 되어 가슴이 뒤흔들린다.
홍명희의 불세출의 역사소설 『임꺽정』에는 화적패의 우두머리 ‘임꺽정’이 나온다. 소설 속 임꺽정은 저돌적이고 화를 잘 내며 부하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독재적으로 군림한다. 가끔은 인자하고 어눌하며 고지식한 면도 보여 주지만, 약점 투생이의 인간이다.
푸가초프는 농민,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다. 둘 다 포악스럽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한 그저 그런 장삼이사들 중 하나였다. 단지 어느 역사적 순간을 만나면 이들은 질서 같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도로부터 튕겨 나와 반항적 인간이 된다.
이들은 떠돌이가 되면서 기존의 공고했던 권력과 지배적 진실이 우습게 보이게 된다. 푸슈킨은 폭도 푸가초프를 빌려 겉으론 억눌린 것처럼 보이나 계기가 되면 언제든 들고일어날 러시아 민중의 저력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홍명희가 도둑 임꺽정을 그리면서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