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삼일운동이 끝난 후 많은 문예 동인지들이 출현한다. 이들 동인지에 실린 낭만주의 시들은 대부분 병적이거나 퇴폐적인 혹은 감상(感傷)적인 성격을 띤다. 원래 낭만주의는 주어진 퍽퍽하고 절망스러운 현실을 넘어서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려는 몸부림이다.
그 이상세계가 동심이나 고향, 전원의 세계와 같이 비교적 밝은 곳일 때도 있지만, 1920년대 시들에서는 대개 밤이나 꿈, 죽음 등의 어두운 세계로 나타난다. 그래서 허무하고 퇴폐적이며 ‘병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당시 시들은 그리 아픈 것 같지도 않은데 필요 이상으로 신음 소리를 낸다. 그리고 슬픔을 과장하며, 진정 슬퍼서기보다는 슬픔을 즐기려(?)하는 시들도 꽤 많다.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그런 시는 아니나, 이 시의 ‘왕’은 다름 아닌 ‘눈물의 왕’이다.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도 그와 비슷하다. 이 시의 부제목은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다"이다. 시인은 이 세상 모든 쾌락을 좇아다녀도 그것이 자신의 절망을 달래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현실을 떠나 어둠과 꿈속의 세계인 동굴로 가려한다.
그러나 시인은 함께 떠나고자 했던 마돈나를 만나지 못한다. 동굴로 가기 위한 “외나무다리”도 건너가지 못한다. 이상화 시는, 당시의 다른 시들과 달리, 시인이 현실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애초 불가능하고, 그리고 그 탈출이라는 것이 결국은 허망한 것임을 안다.
「나의 침실로」는 꿈과 현실의 화해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장 진실하게 깨닫는 좌절의 시다. 이런 좌절은 어쩌면 시인으로 하여금 깊은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박노해 시인은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나의 침실로」에서 이상화는 침실(동굴)로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지도 못하고 더 이상 나가지도 못하지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동굴을 뛰쳐나와 봄이 찾아온 조국의 들판으로 나선다.
보통의 시인이라면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으니 다시 찾아온 봄철의 강산도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노래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비록 강산을 빼앗겼어도 이곳에 찾아온 봄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기막힌 사실을 발견한다.
김소월의 「금잔디」에서 시인은 봄이 되자 지난해 죽은 임의 무덤가를 찾아간다. 쓸쓸함과 슬픔으로 그곳을 찾지만, 그러한 슬픔과는 아랑곳없이 무덤가 잔디들은 심심산천에 불이 붙듯이 황홀하게 피어나고 있다.
즉 소월이나 상화나, 두 시인의 마음은 슬프기 짝이 없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봄은 못 믿을 정도로 아름답다. 시인은 사물에 대해 강력히 느껴야 되지만, 동시에 진실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감정의 진솔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때 ‘감상적 허위’(러스킨)가 발생한다.
감상적 허위란 진실을 못 보고 자기 자신의 느낌에 탐닉하며 대상을 허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시인은 감상적 허위에 빠져 빼앗긴 땅에 찾아온 봄이 슬퍼 죽겠다고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봄에 마음이 들떠서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막상 나가긴 했지만 시인은 무엇을 찾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런 자신이 마치 강가에 나온 철부지 애 같아도 보인다. 그래서 다리를 절며 ‘푸른 웃음’과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상태로 걸어간다.
시인 김수영은 시에서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상화는 빼앗긴 조국 땅에 찾아온 봄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착잡한 심리를 거짓 없이 노래했기에 ‘감상적 허위’ 또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