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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ul 17. 2019

통과 비자로 발트 삼국→ 벨라루스→러시아

체코서 장기비자를 받느라 애를 먹었는데, 유럽에는 ‘통과비자’를 가져야 자기네 나라를 지나가는 걸 허락해주는 나라도 있다. 체코 가기 직전 러시아를 여행했다. 아내는 러시아를 가는 김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껴서 여행했으면 했다. 나는 스칸디나비아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발트 국가를 가고 싶다고 해서 결국은 그리하기로 했다.  

  

일찌감치 서울-모스크바 간 왕복표를 사놓고, 여행 계획을 짜기를 모스크바를 본 후 야간열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기로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서는 레닌이 망명, 귀국하면서 드나든 ‘핀란드역’을 통해 고속열차를 타고 헬싱키로 가기로 했다. 헬싱키서는 페리를 타고 에스토니아로 건너가 거기서부터는 버스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여행하고자 했다. 여기까지는 여행 계획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는데 발트 삼국 여행이 다 끝나고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하는 모스크바까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았다. 

헬싱키 항구. 여기서 페리를 타고 에스토니아로 갔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건 재미없을뿐더러, 온통 돌아가는 일로 시간을 다 써야 했다.  그래서 끙끙대는데 아내가 왜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만 하냐? 그냥 한 바퀴 삥 돌아 모스크바로 가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싶다. 맞다! 리투아니아 이웃나라인 벨라루스 –학교 다닐 때 소비에트 연방의 백러시아로 배웠다-의 수도 민스크로 가 그곳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북상하면 그 길은 새로운 길이기도 하거니와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거리도 몇 배로 단축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도 러시아를 원정하러 갈 때 바로 이 길을 밟아갔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의 원래 목적지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벨라루스의 민스크였다고 한다. 거기서 멈출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만 욕망에 이끌려 러시아 영토 깊숙이 들어간다. 나는 비록 기차이지만 나폴레옹이 간 것처럼 리투아니아에서 벨라루스를 지나 모스크바로 가는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이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가니, ‘성 안나’ 성당이라는 붉은 벽돌의 아주 예쁘고 아담한 성당이 있었다. 나폴레옹도 이 성당이 맘에 들어 손바닥에 얹어 파리로 가져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냥 성당이나 가져가든지 하지, 러시아를 쳐들어갔다가 6개월 뒤 50만 군대 중 겨우 4만 명을 데리고 리투아니아로 퇴각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으면서 이 리투아니아가 등장할 때만 해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나라였는데…… 

나폴레옹은 이 성당이 예뻐 자기 손바닥에 놓고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 했다. 성당이나 가져가지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파국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리투아니아서 벨라루스의 민스크를 가려고 여행 책자를 뒤지니, 벨라루스는 비자 발급도 쉽지 않거니와 그곳은 지나려고만 해도 통과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돼 있었다. 벨라루스 대사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통과 비자를 받으려면 벨라루스서 러시아로 가는 기차표를 소지해야 했다. 문제는 러시아 철도회사의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가면 기차표 구입은 가능하지만 표는 해당 역에 가서 직접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니면 한국서 받는 건데 그 시간엔 이미 우리가 한국을 떠난 후다.   


벨라루스 대사관에 전화를 해 한국인 여직원에게 이러한 사정을 얘기했더니, 기차표가 없으면 비자 발급이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한다. 뭔 다른 방법은 없겠냐며 끙끙거리니깐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끊었다. 체코 대사관도 마찬가지지만 주한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은 대체로 쌀쌀하다.    


아내가 옆에서 지켜보더니, 이럴 때는 대사관을 직접 찾아가야 한다며 자기가 갔다 오겠다고 했다. 속으론 그래 봐야 별 수 있을까 하면서도 내심 기대를 했다. 아내가 다녀오더니만, 며칠 후 비자가 나와 있을 테니 찾아오라고 했다. 오잉!? 아내는 아침 일찌감치 대사관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갔다고 한다. 가보니 다른 사람은 없고 선량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벨라루스 남자 직원 혼자만 아내를 맞는데, 아내는 그이에게 그런저런 사정을 얘기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비자를 내주겠다면서 러시아에 도착해서는 꼭 기차표를 사라고 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벨라루스 직원과 그 일을 다 마쳐가는 순간 바로 나와 전화통화를 한 한국인 여직원이 뒤늦게 출근하더란다. 아내는 그 여자가 행여 뭐라 할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다. 첫 번째 안식년 때인 미국서는 내가 어느 정도 여행의 주도권을 가졌는데, 이후 두 번째 안식년인 유럽에서는 이런 일들을 계기로 아내에게로 그 주도권이 서서히 넘어가게 된다. 

리투아니아 빌뉴스 버스 터미널 이정표에는 민스크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키예프도 있었다. - 그곳도 가보고 싶었다.


벨라루스는 통과 비자로 최대한 이틀을 머물 수 있었는데, 그 잠깐의 시간도 아주 좋았다. 뭐가 좋았냐고 물으면 그냥 남들이 통상 안 가보는 곳이어서 좋았다고 대답하겠다. 실은 벨라루스의 여인들이 그렇게 착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였다. 러시아 여인들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지만 벨라루스의 여인들은 일단 체격이 아담하고 글쎄 뭣보다도 그렇게도 아름다운 여인들이 친절하기까지 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벨라루스서는 아내를 어디다 놔두고 혼자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 출신의 여성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1948~)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라는 작품을 읽고선, 그 착하고 아름다운 벨라루스 여인의 얼굴에 가려진 비극의 역사를 보았다. 벨라루스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의 통로이기도 했지만 이차대전 당시는 독일 나치스 군대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쳐들어가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격전을 치른 지역이기도 했다. 


작가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여군으로 참전한 여인들 200명과 인터뷰를 한 것을 소재로 이 책을 썼는데, 히틀러의 군대든 스탈린의 군대든 ‘조국’을 내세워 ‘국가주의’와 ‘군대’가 보여주는 광기와 폭력적 현실을 여성의 수난을 통해 보여준다. 진군을 하던 여군들은 생리를 하던 중, 다리로 흐른 피가 바지에 그대로 말라붙어 유리 바지처럼 뻣뻣하게 굳어 살이 베어 상처가 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이곳의 여인들은 피 냄새에 시달려, 빨간 블라우스조차 입지 못하며 장 보러 가서는 정육점에조차 두르지 못한다. 


남자 군인들의 경우 적군이든 아군이든 한 곳을 점령하면, 3일간 약탈과 성폭력이 묵인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군들은 적국인 독일 땅으로 들어갔을 때 굶주리고 공포에 떠는 독일 애들을 쓰다듬어주며 먹을 걸 나눠주다가 적국의 애들이라는 사실에 잠시 소스라치기도 한다. 이후 유럽 여행을 하다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옆에 붙은 나라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도 가봤는데 유럽이 결코 문명화되고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었다. 

민스크서 아가씨들에게 길을 묻는 나. 민스크 아가씨들 참 예쁘고 착하다. 민스크에선 나 혼자 있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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