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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Sep 04. 2019

내 흥에 겨워 모라비아 여행

초등학교 시절 나의 취미 중의 하나가 세계 각국의 수도 이름을 아는 거였다. 나 스스로도 그 취미의 정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아마도 장학퀴즈 식의 지식을 얻는 즐거움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자동차 왕은? 헨리 포드, 철강 왕은? 카네기 뭐 그런 류의 지식에 대한 호기심 말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커서까지도 이런 유형의 지식을 아는 게 재미가 있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닐 때다. 어떤 선배가 너는 학문을 하려면 그러한 지식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그건 나도 아는데 그러한 성향이 아직도 남아 있어, 여행을 하는 이유도 이런 단편적 지식 따위를 얻는 즐거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더욱이 여행하던 곳에서 예상치 않았던 지식을 발견하게 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나의 여행은 자기 자신을 성찰해본다든지, 삶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든지 하는 격조 있는 여행이라기보다는 다소 경박한(?) 느낌의 여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볍든 무겁든 그런 때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보다가 이 글을 쓰게 됐는데, 이 글은 나 혼자 즐거워서 다시 말해 제 흥에 겨워 쓰는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체코 와서 얼마 안 돼 프라하 밖으로 나가 처음 여행한 곳이 모라비아 지방이었다. 자가용이 있어 그곳을 속속들이 보고 다닌 것은 아니고,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는 올로모우츠와 브르노 두 도시를 갔었다. 프라하가 있는 보헤미아 지역이나 이 두 도시가 있는 모라비아 지방은 둘 다 내 눈으로 보기에는 비슷비슷했다. 옛 모라비아 제국의 중심지였던 올로모우츠도 그냥 프라하의 축소판이다. 단지 때가 때인지라 모라비아에서는 향긋한 가을 공기가 프라하보다 더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올로모우츠 대학에도 한국학과가 있어 일부러 찾아갔으나 개강 전이라 문이 닫혀 발길을 돌렸다. 시내를 이리저리 다니던 중, 올로모우츠 시내 어디서나 눈에 띄는 바츨라프 성당을 가게 됐다. 작은 도시라서 성당의 첨탑이 유난히도 높아 보였는데, 성당을 구경하고 성당 한편에 위치한 부속건물을 지나치던 중, 그 건물 벽에 모차르트의 흉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 명판을 발견했다.


올로모우츠 바츨라프 성당의 모차르트 명판


모차르트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나는 유독 모차르트를 좋아한다. 우리 학과 선생님은 좋아할 ‘요(樂)’ 자와 모차르트의 첫 글자 ‘모’를 합쳐 내게 ‘요모’라는 익살스러운 아호를 지어 주기까지 했다. 그런 나이기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모차르트를 발견한 기쁨에 가슴이 다 뛰었다. 주위에는 어떤 관광객도 없었기에 구석진 곳에 호젓이 있는 모차르트가 애틋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연인즉슨 모차르트가 11살이던 1767년 오스트리아 비인에 천연두 전염병이 유행했었나 보다. 어린 모차르트 역시 누이와 함께 병에 감염되자, 그의 아버지가 당시 합스부르크 속령이고 비인과 가까웠던 이곳으로 가족을 부랴부랴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병에서 회복하고 이미 비인서부터 구상해왔던 교향곡 6번을 완성시켰는데 올로모우츠와 가까운 브르노 극장에서 이 6번을 공연도 했던 것 같다.  


여행 끝내고 돌아와 그동안 한, 두 번 들었을까 말까 한 교향곡 6번을 다시 들어보았다. 초기 교향곡이라 그의 음악 선배 아니 스승 격인 하이든의 풍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병상에서 벗어나 신선한 감수성으로 충만한 소년 모차르트의 생동감과 함께 올로모우츠 도시의 평화로운 가을 햇살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도 모라비아의 고도 올로모우츠가 그리우면 교향곡 6번을 또다시 들어본다. 이게 나의 여행의 즐거움이다.  


올로모우츠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브르노는 모라비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체코 전체에서도 프라하 다음으로 큰 도시다. 여기도 역시 처음 가보는 낯선 곳이라 이것저것 구경거리는 많았지만 특별하게 유명한 관광명소는 없었다. 시내 구경을 하고 호텔 숙소로 돌아오니 로비에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오늘 프라하 관광을 끝내고 다음 날 비인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곳에서 하루를 묵는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여행할 때 어디로 ‘간다.’는 표현보다는 ‘넘어간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즉 프라하에서 비인으로 ‘넘어간다.’는 것인데 어쩐지 이 표현이 여행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말 같았다.  


이들 관광객들에게 브르노는 여행의 주요 목적지인 프라하나 비인을 가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곳이다. 그런데 체코서 안식년이 끝난 후, 한국에 돌아와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첫 번 읽을 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은 모라비아의 두 도시 브르노와 올로모우츠가, 이 작품 초반부에 주요한 무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폴레옹이 비인을 점령하여 쇤브룬 궁에 머물 때, 비인 왕실이 피난 왔던 도시가 바로 이곳 브르노다. 또 올로모우츠 인근 숙영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황제의 군대 사열식이 행해지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인 러시아 군인 안드레이 공작(나타샤에게 실연당하는 그 안드레이다!)이 오스트리아 쪽에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이 브르노를 방문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인근 아우스터리츠에서 전투가 벌어져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나폴레옹 군대에 대패를 당한다. 안드레이는 여기서 큰 부상을 당하고 나폴레옹과 조우한다. 여행하면서 가봤던 도시들을 문학작품 속에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것이 나의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브르노에서 여행의 즐거움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그날 호텔에 묵으면서 다음날은 어디를 갈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호텔 창에서 맞은편으로 산 위의 성이 보였다. 슈필베르크 성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은 그곳을 갔는데 그 성에는 우리를 빼고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내는 좀 옛날 사람이라 바깥나들이를 할 때 여간해서 나의 팔짱을 낀다거나 손을 잡고 다니는 일이 없다. 그런데 그곳 가을 고성에서 우리 부부는 젊은 연인과도 같은 모습으로 성벽을 거닐었다. 


그러나 그게 즐거운 얘기의 다가 아니고 성을 올라가는 초입에 완두콩 그림 간판과 함께 수도원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산 쪽으로는 포도밭이 펼쳐있고 수도원 안에는 온실과 텃밭도 있는데 안내문이 보였다. “유전의 법칙은 1865년 아우구스투스 수도사 멘델에 의해 발명되었다. 유전학의 기초가 이 수도원에서 입안되었다.” 브르노에서 수도사 멘델을 만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인데,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예수회 열성 신부들이 중국에 가서 과학을 통해 기독교 신학의 우수성을 전하려 했듯이, 멘델은 어쩌면 이곳 수도원에서 평생을 신앙과 더불어 과학연구의 열정을 불태웠으리라.           


브르노 멘델 동상에서

 멘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모라비아는 아니지만 프라하 성 올라가는 길에는 천문학자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가 함께 있는 동상이 있다. 케플러는 원래 독일 출신으로 오스트리아로 가 수학선생을 했는데, 루터교도였던 그는 오스트리아서 가톨릭의 박해가 심해지자 프라하로 와서 티코 브라헤 밑에서 천문학 연구를 한다. 그러나 이후 프라하 쪽에서도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거센 폭풍이 일고 결국 가톨릭이 이 지역을 장악하자 케플러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케플러에 대해서 더 이상 아는 건 없고, 단 내가 프라하 살던 시절 이곳을 여행 중이던 우리 학교 물리학과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양반을 케플러 동상으로 데리고 가서 잘난 체했던 것이 나의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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