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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ul 13. 2019

유타에서의 운전면허 시험

미국서 차 없이 산다는 것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떠나 대단히 불편한 일이다. 미국의 지방도시가 다 그렇겠지만 유타 지역의 도시 역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넓게 분산돼있다. 전체적으로 분산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가 불편하고 걸어서 이동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실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기도 하다. 평균적인 미국인이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갈 의향이 있는 최대 거리는 고작 183미터에 불과하다는 얘기까지 들은 적도 있다. 하여 우리 역시 미국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채 안 돼 서둘러 차를 구입했다.


운전은 한국서 갖고 온 국제면허증으로 해도 되지만, 여기서 잠시라도 살려면 미국에서 발급한 운전면허증이 필요했다. 운전면허증이 신분증을 대신하기에 최소한 동네 도서관서 애들 책을 빌리거나, 비디오 가게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려고 해도 운전면허증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동차 보험을 들 때 면허를 딴다는 조건으로 할인 혜택을 받았기에 면허를 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면허시험을 보기로 했는데, 주마다 면허 취득 방식은 각양각색이지만 유타 주는 비교적 쉬운 편에 속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서도 운전면허를 간신히 땄다. 원래 나는 평생 운전을 안 하고 살려고 했다. 내가 무슨 환경론자라 그런 게 아니고 자전거도 탈 줄 몰라 언감생심 운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가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지고 실의에 빠진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한 나도 우여곡절 끝에 같이 면허를 딴 것이다. 그런데 미국까지 와서 또다시 면허를 따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평균 세 번 이상은 시험을 치러야 합격한다는 얘기도 들어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아내의 설득으로 간신히 하게 됐다. 


미국도 면허시험 장소는 북적인다. 아마 유타에서 내가 경험한 북적대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물론 그때가 방학 중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처음에는 면허시험장 위치도 알 겸해서 유학생을 쫓아가 필기시험 대비용 핸드북 하나를 구해 왔다. 면허시험공부를 한 건지, 영어 공부를 한 건지 모르지만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그냥 준비 없이 시험 보러 가는 사람들도 태반이라는데, 나의 경우 밝히기 곤란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   


필기시험은 감독관 감시 아래 엄격하게 치르는 줄 알았는데, 면허시험 응시 원서를 내던 장소 바로 그곳에서 테이블 앞에 선 채 웅기중기 모여 뭔가 쓰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원 이런 식이라면 누구를 옆에 데리고 와서 슬슬 물어보면서 시험을 치러도 무방하지 않은가? 실은 그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 가관은 사지선다형 문제지를 갖고 와 시험을 치르는데, 누군가가 문제지에 흐릿하게 정답 표시를 해놓았다. 처음에는 낙서인 줄 알았는데, 막상 풀어보니 그 게 모두 정답이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실기시험을 치렀다. 유타 주는 시내주행 시험은 없고 실기시험장에서만 시험을 치른다. 나는 몇 차례 시험을 치를 각오는 했다. 그러니 실기시험만 몇 번 치르다 보면 미국 생활이 끝날 판이었다. 그런데 유학생으로부터 시험에 붙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팁을 전수받았다. 우선 남자 시험 감독관을 만나면 “Good morning, sir!”이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여 좋은 인상을 주라고 한다. 그리고 감독관이 주행시험 시 “stop(멈춤)”, “rear(후진)” 등등을 지시할 때, 큰 소리로 이를 복창하면 후한 점수를 받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차선을 바꾸라고 지시하면 백미러만 대충 보지 말고, 확실히 머리를 젖혀 차 밖으로 고개를 쑥 빼 돌려보는 자세를 ‘연기’하듯이 하라는 것 등등이 주요한 사항들이었다. 


실기시험 치르러 가는 날 공포에 떠는 나를 응원하기 위해 아내가 같이 갔다. 아내도 들은풍월은 있어, 감독관이 나타나자마자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새 먼저 “Good morning, sir!”하며 선수를 쳤다. 순간 감독관은 아내가 시험 치르러 온 줄로 알고 빨리 차에 올라타라고 했는데 수험생이 나라니까 다소 실망하는 듯했다. 


감독관은 은발의 멋쟁이 할아버지였다. 나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봐, 한국서 왔다니까 자기 아들이 한국서 모르몬 선교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야 이건 징조가 좋다. 그래서  당신도 한국에 와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서 인연을 이어 가볼까 했는데, 자기는 간 적은 없단다. 나보고 여기서 무슨 일을 하냐고 해서 브리검영 대학의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로 와있다고 했더니 “굿”하면서 호감을 보여 주었다. 야 이건 반쯤 합격된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시험 치르는 시간 동안은 아주 엄격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내가 몇 번 실수를 하여 동정을 구하려고 탄식을 하여도 일체의 반응이 없었다. 


유학생이 조언해준 복창을 크게 하는 것을 빼놓곤 모든 것을 엉성하게 치렀다. 복창 소리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게, 군 시절 총검술 훈련할 때 자세는 늘 엉망일지라도 기합 소리 때문에 상점을 받은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테스트였던 평행 주차(parallel parking) 해놓은 내 차를 보니 주차공간이 워낙 넓어서 차가 들어와 있지, 대각선으로 삐딱하게 놓여 있었다. 앞서 라티노 할아버지는 평행주차를 아주 매끄럽게 했음에도 불합격한 걸 보니 나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이런 것도 모르고 시험이 끝날 즈음 아내가 또다시 어디선가 나타나 감독관에게 “Thank you, sir!”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인사했다. 


도대체 뭘 고맙다는 건지? 불합격시켜줘서 고맙다는 건가? 그런데 바로 그 “쌩큐, 썰” 덕분이었는지, 감독관은 그 자리에서 점수를 불러주며 합격을 축하했다. 내가 단 한 번에 붙다니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한 일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실기시험에서 운전 기술보다도 ‘운전 태도’를 더 중시한다는 얘기를 후에 들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감독관에게 운전을 벌벌 떨 정도로 조심스럽게 한다는 점은 확실히 보여줬으니 말이다. 그래서 미국서는 운전을 그런대로 잘했는데 이후 유럽에서 안식년을 지낼 때 차 사고를 내게 되고 이후 운전의 주도권이 아내에게로 넘어가는데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다.   


미국서는 비교적 배운 대로 운전했다. 횡단보도 인근에 사람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철저히 멈춰 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나라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차가 사람을 피하는 나라고, 또 하나는 사람이 차를 피하는 나라다. 이곳에서는 확실히 차가 사람을 피한다. 스쿨존을 지나갈 때는 누가 보든 안 보든 규정 속도를 엄수했다. 이러한 나의 준법정신은 미국 경찰에게 걸렸을 때 영어로 어떻게 대처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귀국해서도 한동안 습관이 되어 횡단보도를 지나갈 때 멈춤을 철저히 지켜보았다.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가 지나갈 때까지 잘 건너려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가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수상하다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기도 하여 지금은 다시 한국식으로 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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