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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Feb 09. 2020

나혜석의 ‘엄마가 된 감상기’

우리 학교 국문과는 여학생 숫자가 남학생보다 훨씬 많다. 이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여학생들을 의식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수업을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우리 과 여선생님 말로는 나 역시 한국 남성 특유의 가부장적 시선이 언행 속에 녹아있고, 때로는 마초적인 모습까지 보여 실망스러웠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자를 밝히는(?) 것과 페미니즘을 혼동하지 말라는 조언까지 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성작가 나혜석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가 남긴 소설은 두 편 밖에 없어 소설사 시간에 더 이상 길게 다루지는 못한다. 단 가끔 시간이 되면 그의 수필 중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 학생들에게 소개하는데  「모(母)된 감상기」 (1923)라는 글도 그중 하나다.   


이 글은 이상경 교수가 펴낸 『나혜석 전집』에 물론 수록돼있는데, 나혜석 자신의 출산과 육아의 체험이 소재가 된 글이다.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건, 글 전반부에서 출산의 고통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운율에 맞춰 “아프데 아파/참 아파요 진정”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갖은 비유, 특히 의성어 또는 의태어적 비유들을 동원해 출산의 고통을 다양 다기 하게 그린다. 마지막 연에 가서는 팔짱 끼고 섰던 남편이 아내에게 “참으시오”하는 말에, “이놈아 듣기 싫다”라고 냅다 욕을 하는 바람에 기겁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나는 아내에게도 이 시를 보여주며 출산의 고통이 진짜 이러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아내는 웃으면서 출산의 체험을 문학으로 이렇게 표현해낼 수도 있다는 점을 역시 신기해했다.  


글의 뒷부분은 출산 후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특히 잠을 맘대로 못 자는 괴로움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자식이란 모체(母體)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임신에서 시작되는 ‘엄마 되기’가 여성에게 행복이 아니라 공포이며, 화가로서 창작열에 불타는 자기에게는 회피하고 싶은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성을 절대시하고 신비화하는 통념에 대한 의문과 부정을 표시한다. “모성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아들을 중시하고 딸을 천시하는 관습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기야 중국에서도 예전 한 자녀 정책을 실시할 때 아들이 아닌 딸을 낳으면 유기한다는 소문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근자에 오나 도나스의 『엄마 됨을 후회함』이라는 책을 읽으니 한 학설에 따르면, 모성애가 세계 보편적이거나 역사를 초월한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오히려 19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발명품으로 핵가족의 탄생과 상관관계가 있으며, 인구변화와 신생아 사망률 감소의 결과이기도 한데, 이러한 것들이 자식에 대한 강한 애착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모성애가 마치 순수하고 천성적인 욕구이자 생물학적 본능인 것처럼 말하지만 인간의 선조들은 임신한 여자를 죽은 여자로 생각하고, 한 생명이 태어나면 다른 생명이 죽듯이, 수많은 여성들이 새 생명을 낳으면 자신의 삶을 상실하는 경험을 한다고 주장한다. 


나혜석 또는 오나 도나스의 이러한 생각과 주장들이 전적으로 맞는 것인지, 그리고 내가 이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이 모성의 여러 다른 면모들을 생각하게 해 준 건 분명하다. 왜 옛날에는 모성애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엄마로서의 비도덕성, 여성성의 부족, 결함 있는 성격, 무능력의 증거가 되지 않았던가? 각도는 약간 다르나 봉준호 감독의 『마더』  역시 현대 모성애의 광적일 정도의 집착적 성격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지 않는가?


나혜석 문학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주목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를 갖지만, 나에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은 이후 소설사 강의에서 남성 작가들로 이뤄진 한국 소설사를 전복해서 이를 낯설게 하고 다시 새롭게 보게 하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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