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 속의 ‘가을’

by 양문규

김유정 소설의 무대는 대개가 강원도 산골 농촌이고, 계절적 배경으론 봄이나 가을이 많다. 그중 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저 유명한 「봄‧봄」(1935)과 「동백꽃」(1936)이다. 이들 봄을 배경으로 한 김유정 소설은 목가적이고 희극적이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에 반해 가을을 배경으로 한 김유정의 소설은 비극으로 끝난다. 우선 그의 「가을」(1936)은 비극까지는 아니더라도 쓸쓸하기 짝이 없다.

「가을」의 농사꾼 ‘복만’은 늦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니 빚 가림도 못하겠거니와, 당장 식구들과 겨울을 날 도리가 없어 아내를 소장수에게 팔아넘긴다. 복만의 친구인 ‘나’가 소장수와 복만 사이에서 계약서를 써주는데, 나는 복만에게 어린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아내는 팔지 말라고 권하고도 싶지만, 가난으로 혼인조차 못한 나는 팔 아내라도 있는 복만을 외려 부러워한다. 복만의 아내가 팔려간 며칠 후, 그녀가 도망을 쳤다면서 복만 부부를 찾아내라고 소장수가 나를 찾아와 주재소로 끌고 가려한다. 하여 나는 해 질 녘 소장수와 함께 복만 부부를 찾아 나선다.


“해가 마악 떨어지니 산골은 오색영롱한 저녁노을로 덮인다. 산봉우리는 숫제 이글이글 끓는 불덩어리가 되고 노기 가득 찬 위엄을 나타낸다. 그리고 나직이 들리느니 우리 머리 우에 지는 낙엽소리!”


산골의 가을은 깊어 가는데 가난한 농민들의 처지는 난감하다.


「산골 나그네」(1933)의 무대는 고된 농사일에 서른이 가깝도록 노총각을 면치 못한 ‘덕돌’이가 홀어미와 함께 살아가는 산골 주막이다. 어느 가을밤, 남편을 잃고 비럭질로 떠도는 열아홉 살의 여자 나그네가 찾아든다. 그녀는 덕돌 모자의 구슬림에 넘어가는 척, 결혼에 응한 후 도망질을 한다. 그녀는 실은 병든 남편을 부양하기 위해 혼인 사기를 벌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망가면서 남편에게 입힐 옷가지들만을 챙겼지, 시어머니가 혼수로 해준 비싼 은비녀는 베개 밑에 그대로 두고 간다. 나는, 유정이 은비녀는 놔두고 간 이 착한 며느리를 그릴 때 혼자서 울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 잠긴다. 도망친 여인은 병든 남편의 손목을 잡아끌고 “늑대 소리가 이 산 저 산서 와글와글 굴러 내리는” 으슥한 가을밤의 산 편으로 사라져 간다.


「만무방」(1936)의 서두는 가을이 무르녹아 가는 강원도 산골 마을에, 주인공 ‘응칠’이 유유자적 송이를 찾아다니는 데서 얘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산골의 가을은 역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은 아니다. 한창 바쁜 추수철임에도 닭서리에 노름이나 하고 다니는 ‘만무방’(막돼먹은 인간) 응칠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근면한 소작농이었다. 그러나 지주의 소작료를 견디지 못해 처자를 데리고 밤 도망을 쳐 유리걸식하다가 눈보라 치는 밤 처자와 갈라서고 이제는 도박, 절도 등의 전과 사범으로 떨어졌다.


응칠의 아우는 아직은 성실한 소작농이지만 병든 아내를 수발하느라 살림이 거덜 나고, 타작 후 지주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까 봐 밤을 타서 자신의 벼를 훔쳐가야 하는 도둑 아닌 도둑의 처지로 떨어진다. 응칠은 아우에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자신과 함께 소 도둑질을 하자고 제안한다. 아우는 굶어 죽을지언정 형처럼 살지는 않겠다며 단호히 거절하나, 독자들은 아우가 걸어갈 앞길이 너무나도 뻔히 보이기에 안타깝다.


나는 봄을 배경으로 한 유정의 작품도 좋지만 가을을 그린 그의 작품에 더 마음이 간다. 그건 아마도 유정이 가난한 자들의 슬픔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자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슬퍼하며 우리의 마음을 그들의 마음에 연결할 때 우리의 영혼은 확장된다. 누군가의 아픔에 같이 하는 것은, 그리고 누군가를 나의 슬픔으로 느끼는 것은, 나의 삶을 다른 삶에 연결시켜 자신의 삶에 대한 앎의 지평을 넓히고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인간에 대해 눈물을 머금으며 이야기하는 작가만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한다.”


김유정.png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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