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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는 삼세번

@태백

by 무누라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어느 날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야, 너 동생 교통사고 나서 병원 갔데!"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앞이 캄캄해졌다. 어렴풋이 귓가에 울리는 소리들 가운데 어느 병원 이름이 나왔고, 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일순간 나의 뇌는 생각 회로를 정지하고 모든 뇌세포를 동원하여 감각 기관에 명령했다. '뛰어라! 병원으로 가야 한다.'


울면서 무아지경으로 달렸다. 순간 머릿속으로 엄청난 생각들이 터져 나왔다. '어, 뭐 야. 여긴 어디? 그 병원은 어디 있는 거야? 아, 일단 빨리 뛰자.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이 자식은 어떻게 됐지? 빨리 가봐야 할 텐데. 엄마 아빠는 어디 계시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이 씨, 그 놈은 뭐하다가 사고가 난 거야 제기랄!', '젠장, 같이 데리고 놀았어야 했는데, 이게 뭐 야.', '힘이 다 떨어졌나? 왜 발이 안 움직여지지.', '별일 아니겠지? 많이 다쳤나? 죽으면 어떡해? 난 외동 아들 되기 싫은데.' 차마 다 기억 못하고, 다 옮기지 못한 생각들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머릿속에 꽉 찬 말풍선들은 이내 과부하를 일으키고 사고 정지 상태를 불러왔다. 그 순간 이성은 마비되고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이 눈으로 모였다. 보도 블록의 네모 네모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멀리서 다가오던 작은 네모는 어느새 내 앞으로 커다랗게 나타나 내 발바닥을 밀어냈다. 그 옆으로 연석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하얀 분필 같은 연석들이 매우 빠르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간혹 홈이 파이고 부러진 연석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반대편에는 알록달록한 상가들이 스쳐갔다. 빨간 간판, 노란색 문, 어지러이 흩어지는 하얗고 까만 글씨들. 모든 색과 배열이 지나치게 인공적이라서 불편했다. 드문드문 상가와 상가 사이 빈 공간 넘어 멀리서 보이는 푸르른 산이나 맑은 하늘이 나를 달래 주었다. 쇼윈도의 마네킹과 눈이 마주쳤다. '너 여기서 뭐하니 얼른 뛰지 않고?'


순간 보도 블록이 끊어지고 콘크리트 바닥이 나타났고, 기름 냄새가 가득 들어왔다. 얼굴을 찡그림과 동시에 손을 들어 코를 막았다. 불편한 자세로 달리기도 잠시, 절로 손을 내리게 하는 참기름내가 났다. 김밥을 마는 아주머니 손길 따라 주유소의 거짓된 기름은 밀어내고 고소한 참기름이 나를 위로했다. 거기에 오징어, 계란, 김 말이 등 각종 튀김과 함께하는 식용유 냄새가 번졌다. 유혹에 지지 않게 더 빨리 달음질쳤다. 기름내를 뚫고 가니 새로운 냄새의 장막이 걷혔다. 비릿하고 찌릿했다. 계란 노른자가 썩는 듯하면서 구수했다. 시큼한 향이 찌르듯 다가오다 이내 흩어졌다. 상쾌한듯 알싸한 냄새 가루가 다가와 터졌다.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엄청난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리고 스위치가 꺼진 것 마냥 주저앉았다. 더 이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성은 달아난 지 오래요 이젠 감각마저 사라져서 달려야 하는 이유도 의지도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때 무의식 중에 스치고 가는 한 마디가 있었다. '교통사고는 삼세번이야.' 사람은 3번 교통사고가 나면 죽는 다는 어느 친구의 말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터부시하며 흘려들었던 말이지만, 그 순간은 흩어지지 않도록 억지로 붙잡았다. 쓰잘데기 없는 개똥철학에도 강제로 의미를 부여해야 했다. 그래야 나도 내 동생도 살 수 있었다. 내 동생은 이번이 첫 교통사고이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통사고는 삼세번'이어야 했다.


감각이 살아나고 이성이 돌아왔다. 병원 앞마당에 서 있었다.


그 외에는 기억이 안 난다. 병원에서 엄마를 만났었나? 난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나? 동생은 얼마 동안이나 병원에 있었지? 그날 하루 뭘 먹었지? 잠은 잘 잤었나? 그 날의 풍경, 그리고 ‘교통사고는 삼세번’만이 뇌리에 남아있었다. 다행이 동생은 오토바이 백미러에 스치듯 부딪힌 가벼운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사진: UnsplashBeris Crea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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