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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세 Jan 09. 2021

Ep.3 내가...

2020년 12월 7일

11월 30일 폐 조영 CT를 찍은 이후 일주일의 시간은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애써 억지로 밀쳐내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은 서서히 그 세력과 잔상들을 확대했고 나의 의지는 일부러 긍정적인 잔상을 만들어내기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마침 프로젝트도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면서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한창 바쁠 때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관련 정보들을 부지런히 검색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찜찜함을 털어내야 기분 좋게 영국 관련 정보들도 검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국 법인에서 비자 신청을 대행하는 변호사님이 예약한 일정에 맞춰 남대문에 있는 영국 비자센터에 가서 비자 신청을 접수했다. 법인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들어왔으면 해서 비자 수속도 우선순위로 진행하도록 신청해주었다. 비자 신청을 마치고 나서 한 달 가까이 멈추지 않는 기침을 잠재우기 위해 내과에 들렀다.


내과에서 진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갑자기 살이 찌면 천식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금연은 필수라고 말씀하셨다. 11월 27일 건강검진 센터에서 전화를 받은 이후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께 기침이 멈추지 않으니 항생제를 넣어달라고 부탁드렸다. 의사 선생님께서 항생제가 기침 멈추게 하는데 직접적인 효과가 있지는 않다고 하시면서 3일 치 항생제를 함께 처방해주셨다. 그때까지도 결절이라는 의학용어조차 모르고 있던 나는 의사 선생님께 얼마 전에 건강 검진에서 폐결절 증세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결절이 무엇인지 문의드렸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쉽게 말해서 폐에 혹이 발생한 거라고 하시면서 별일 아니겠죠라고 하면서 안심시키려 하셨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그냥 폐에 단순한 혹이 생긴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병원을 나왔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근처 마트에 들러서 기침 예방에 효과가 좋다는 모과차 액상을 구입해갔다. 기침이 한 달 동안 지속되는 동안 미련하게 약국에서 약을 구입해서 때우려 한 게 후회가 들기도 했다.


사무실에 가자마자 병원에 처방한 약을 먹고 마트에서 구입한 모과 액상을 뜨거운 물에 풀어서 계속 마셨다. 그런데 당분이 많아서인지 내가 기대했던 모과의 맛과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처방받은 약을 먹은 뒤로 나를 괴롭히던 기침이 조금은 줄어든 느낌이었다. 곧 보게 될 폐 조영 CT 검사에서도 별 탈이 없을 거라는 기대도 살짝 들게 하는 기침의 멈춤이었다.


어수선하게 흘러간 일주일.. 폐 조영 CT 검사 결과를 보러 가야 하는 12월 7일이 되었다. 오후에 진료가 예약되어 있어서 오전에 사무실에 나왔다가 오후에 팀장님께 잠시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차로 가는데 주차장은 혼잡하기 그지없었고 주차를 기다리는 차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진료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여유 있게 나왔는데 주차하는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결국 예정된 진료시간을 넘겨서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나처럼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꽤 있었는지 접수하는 간호사 분이 대수롭지 않게 조금만 순서 기다리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내 순서가 되었는데 간호사 분이 들어간 후에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를 차례인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검사 결과가 안 좋게 나와서 더 들여다보고 있는 것인가?'라는 불안함이 엄습하였다.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나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일주일 전에 만났던 의사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바로 "빨리 입원해야 될 것 같아요"라고 한마디를 툭 던지더니 여전히 애매모한 말투로 또다시 "아니 나이도 젊은 사람이.."를 반복하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충격보다는 불쾌함이 먼저 밀려들었다. 젊은 사람은 아프면 안 되는 것인지 그리고 환자를 앞에 두고 왜 자꾸 조롱하듯이 얘기하는 것인지 등의 느낌으로 인해 기분이 급격히 불쾌해졌다.


니: "수술하면 되지 않나요?"

의사: "수술 안돼요"

나: "도대체 몇 기인데요?"

의사: "4기인데.. 이것도 조직 검사해보기 전까지는 딱 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어요. 종양이 양성인지 악성 인지도 봐야 하고..."


나는 물어보면서 애써 '암'이란 단어는 꺼내지도 않았다. 의사 선생님 역시 일부러 애매모호함으로 둘러대면서 나에게 전달된 충격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당시 접했던 기분은 환자를 앞에 두고 애매모호하게 내용을 전달하는 의사 선생님에 대해 신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장 조직검사가 필요하다고 하여 조직검사를 다음 날 오전으로 예약했다. 어차피 오후에 서울 삼성병원 진료가 예약되어 있어서 휴가를 낸 상황이었다. 진료실을 나오니 서서히 눈가에 눈물이 그렁대기 시작했다. 좀 어이가 없었다고나 할까..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내가???'라고 느꼈던 그 기분이 '내가...'로 바뀌면서 거친 폭풍이 내면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폭풍이 너무 거셌던 탓인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와이프에게 전화해서 결과를 설명했지만 나 자신이 4기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어딘가에 전이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자세히 조직검사를 받아야 된다고만 얘기했다. 건강검진 당시 받았던 PET CT 결과에 나온 영상에는 폐에 2cm가량의 결절과 기관지 주변 임파선에 몇 개의 작은 종양들과 오른쪽 갈비뼈 뒤쪽에 종양이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직검사를 아직 받지 않았으니 벌써부터 확실하게 암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무님께도 바로 문자를 드려서 조직검사를 받아야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상무님께서는 "불안하게 왜 이래"라고 하시면서 조직검사 결과 나오는 것을 지켜보자고 말씀하셨다. 일부러 나를 안심시키려고 말씀하신 것이 느껴졌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서 찍은 폐 조영 CT 결과도 건강검진 때 찍은 PET CT와 별반 차이가 없게 나왔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는지 다음 날 예약된 서울 삼성병원에 가면 무언가 다른 결과를 받아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의식적으로 품게 되었다. 병원 진료를 다 마치고 나니 시계는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사무실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집으로 바로 향하였다.


집에 와서 애써 마음을 억누르려고 애를 썼다. 때마침 영국 법인에서 Zoom으로 전체 유럽법인 워크숍을 진행한다고 연락이 와서 잠시 잠을 청하고 새벽에 접속해서 워크숍에 참석했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 메신저로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면서 머지않아 보게 될 텐데 반갑다고 개별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건네받은 인사말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2시간 동안 워크숍 참석을 마치고 새벽에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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