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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niciel Mar 25. 2021

15. 한낮의 술

오후 세 시에는 맥주잔을 들자

그때부터 나는 틈만 나면 이태원으로 갔다. 사람 만날 일이 생기거든 강남으로 가지 않고 이태원에서 보자고 했다. 논산 친구들이 내 얼굴을 보겠다고 서울에 올라올 때도 이태원으로 데리고 와서 시간을 보냈다.


한낮에 이태원에 가서 녹사평의 푸른 풀과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큼 평화로운 일이 없었다. 나는 꼭 루프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옥상에 올라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 이곳에서는 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맑게 보인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정말 시시하고 별거 아닌데 이상하게 좋았다.


그리고 꼭 대낮이니까 맥주를 마셔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친구들을 꼬드겨 맥주를 한 잔씩 했었다. 술을 배우기 전에 실수로 보리차인 줄 알고 맥주를 한 입 삼켰던 적이 있다. 엄청나게 맛없고 쓴 맛에 괴로워하며 도대체 어른들은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내가 맥주 한 잔에 행복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맥주는 저녁에 마시는 것도 좋지만 낮에 마시면 더 짜릿하고 신나는데 아마 낮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 보통의 규칙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규칙을 마음대로 어기면서 나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들떠있었다.


대부분 오후 5시쯤이나 되어서야 술집들이 문을 열지만 이곳에서는 낮에도 술을 파는 곳이 꽤 있어서 낮술 플레이스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오후 서너 시의 프랑스를 추억했다.


노르망디의 긴 겨울이 끝나고 아주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던 날, 나는 친구들과 이 훌륭한 날씨를 기념해야겠다며 마음대로 자체 공강하고 시내 광장에 나갔었다. 나는 노천카페 테이블에 앉아서 심심하게 맥주를 한두 잔 하면서 끊임없이 대화하던 사람들과 기분 좋게 내리쬐던 햇살을 떠올렸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유럽적인 모습을. 그리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행복이란 파란 하늘을 보면서 가장 좋은 사람들과 한낮에 맥주 한 잔을 할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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