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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공간, 젠틀몬스터 쇼룸

계동 중앙탕의 새로운 쓰임

by 우주 oozoo

(2019년 5월 방문)


내가 이십 년을 넘게 살아온 우리 동네에는 목욕탕이 두 세 개쯤 있었다. 일요일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가 초콜릿 우유 하나 물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그렇게 좋았다. 목욕 문화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목욕탕은 하나씩 문을 닫았고 이제는 딱 한 개만 남았다. 과연 '한양탕'은 언제까지 영업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지켜보는 중이다.


조용한 동네 계동. 동네 목욕탕이었던 중앙탕이 선글라스 매장으로 바뀌었다. 문을 연 지 4~5년쯤 되었고 지나가다가 한 번 들러봤지만, 안국역을 지나다 생각이 나 다시 한번 가봤다.


쇼룸 입구 ⓒ 우주 OOZOO


예전에 봤던 어떤 사진에서는 예스러운 폰트로 '목욕탕'이 써진 간판이 달려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간판은 떼어지고, 입구의 'bathhouse'만이 목욕탕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목욕탕 설비들 ⓒ 우주 OOZOO


계동 쇼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젠틀몬스터라는 브랜드의 느낌과 캐릭터를 한껏 살리면서도 공간의 역사와 맥락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을 데우던 보일러나 사우나실을 연상케 하는 나무 벽 같은 것들. 그리고 물, 비누, 욕탕 구조처럼 관련된 무언가를 떠오르게 하는 디테일들.


직원들이 하얀색 옷을 입고 있던 것도 왠지 목욕 가운이 생각났다. 이것도 연출된 모습일까?


목욕탕이 저절로 떠오르는 공간 활용 ⓒ 우주 OOZOO


목욕탕이었던 공간을 활용하는 경우, 목욕탕 특유의 냄새 때문에 목욕탕이었던 흔적을 많이 유지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젠틀몬스터 쇼룸 안에서는 딱히 냄새를 의식하지 못했는데, 공사하면서 그런 부분을 잘 처리했나 보다. 디퓨저가 곳곳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전 목욕탕 모습이 상영되는 자투리 공간 ⓒ 우주 OOZOO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다락방이었을 것 같은 자투리 공간이 있었다. 벽에 설치된 빔에서 옛날 목욕탕 모습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냥 보기에는 철거하다가 '에이, 힘드니까 그만하자' 하고 버려둔 것 같은 벽이지만, 이런 차분한 톤의 사진이 연속으로 등장하니 이 자체로 훌륭한 콘텐츠가 된다.


가벽을 세워 창고로 써도 될법한 공간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다는 건 상상력이 그만큼 세밀하다는 것이겠지. 건축법상 비워놓아야 하는 공간이더라도, 여기가 계동 쇼룸의 가장 디테일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쇼룸 3층 ⓒ 우주 OOZOO


쇼룸의 가장 윗 층은 자연광을 활용하고 있었다. 1, 2층에서는 완전히 닫힌 공간이었는데, 3층은 갑자기 탁 트인 느낌이라 '우와~'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마침 날씨가 좋아 하늘색과 나무가 더 예쁘게 보였다.


3층은 두 개의 테라스가 연결되어 있다. 옛날 목욕탕 굴뚝을 구경할 수 있었다. 목욕탕을 리모델링한 곳은 꼭 굴뚝을 남겨놓더라.


옛 중앙탕 굴뚝 ⓒ 우주 OOZOO


고가의 선글라스를 팔고,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주 고객층인 브랜드가 이렇게라도 옛 정취를 남겨두는 것이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이나마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긴 하니까. 하지만 어쩐지 섭섭했다. 계동 사람들은 이제 어디서 목욕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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