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여 나누기

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 03 <박준> 기획자 후기 노트

by 우주 oozoo

세 번째 텍스트클럽이 열린 지난 목요일은 너무 다이내믹했다. 공공에서 일했던 3년 치 다이내믹 중에 제일 크지 않았을까 싶다. 점심 먹는 30분 빼고는 9시간을 꼬박 바쳐 치렀던 행사.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1. 행사 날 아침, 무대 세팅을 바꾸러 내려갔던 파랑새극장에서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만다. 객석 왼쪽, 최소 10석의 의자 위로 물이 똑 - 똑 -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지. 행사까지는 일곱 시간이 채 남지 않았고.
2. 건물에 물이 스며들면, 물은 어딘가에 고여있기도, 어딘가로 흘러가기도 한다. 물이 말라 더 이상 흐를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누수란 그런 것이다. 마를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그저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
3. 급히 SOS를 보내고, 물기를 훔쳐내고, 배기구를 열고, 에어컨을 파워모드로 틀었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저녁 시간에 대관이 없어 001스테이지가 비어있었다. 스케줄을 확인하자마자 조이와 공간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다리 무서워서 조이가 대신 해줬다 흑흑 고마워요 ⓒ 우주 OOZOO


4. 까딱하면 한 끼도 못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점심을 해치웠다. 관객의 정수리에 물이 떨어지도록 둘 수는 없었기에, 행사를 다섯 시간쯤 남기고 긴급한 공지를 보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5. 기획자에게는 무대 위의 의자, 꽃의 종류와 색깔까지 고민인 법. 성에 안 차는 공간에서 성에 차는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게 가능할 리도 없다. 무척 속상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이 사라졌다. 정말이다. 두시 반에 시계를 봤는데, 어느새 네시 반이 되어있더라.
6. 고민하는 도중 민 소장님이 도착하셨다. 우리 팀이 '보살'이라고 부르는 공사 계의 바흐. 너무나 프로페셔널하고 꼼꼼한 소장님의 진단을 받는 데까지 또 한 시간이 흘렀다.


공사 계의 바흐 민 소장님 ⓒ 우주 OOZOO


7. 이번에는 사인본 작업으로 일찍 도착하신 시인님과 출판사 관계자분들 맞이. 대기실 역시 급하게 마련했으므로, 대관과 대관 사이에 잘 이동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8. 공간이 바뀌었기 때문에 입퇴장이나 조명, 음향도 달라져야 했다. 프로 중의 프로 케일이 계셔서 어찌나 다행인지. 콘솔이 말썽이라 점검하는 사이 두 시인님이 머리를 맞대고 연필을 깎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9. 사인본이 25%쯤 준비되었을 때부터 관객 입장이 시작되었다. 컴플레인하거나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분들은 없었다.
10. 드디어 암전이다. 이때부터는 시간 체크만 잘하면 된다.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번 텍스트클럽은 박준 시인님의 일정 때문에 사인회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인님께서 독자의 아쉬운 마음을 헤아려 두 시간 일찍 오셔서 증정 도서에 미리 사인을 해두셨다. 게다가 그 도서는 사실 시인님이 구매해서 선물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했다. 20만 부를 팔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너스레와 함께. 참 다정한 마음.


다이내믹한 하루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시인님이 머리를 맞대고 연필을 깎는 장면. 오늘의 선물은 시인님이 깎고, 텍스트클러버의 이름을 적은 연필이었다. 손잡이용으로 연필에 연이어 타공이 되어있는 파란 독일제 연필이었는데 (앗 혹시 '파랑새극장'이어서 파란색이었나?) 타공 된 곳에 뭐라 뭐라 글귀도 적어주셨다.


리허설 중. 연필 깎는 박준 시인님 ⓒ 우주 OOZOO


박준 시인님은 툭툭, 편안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마치 글처럼 다듬어진 문장이 이어졌다. 듣고 메모하는 내내 걸어 다니는 산문집 같다고 생각했다. 유희경 시인님 진행은 나날이 빛을 발하고 있고, 걱정했던 이런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채 행사가 무사히 끝났다.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고 대충 정리를 마쳤을 때가 열 시. 다 식어버린 배달 음식을 먹으며 긴장이 확 풀렸다.

텍스트를 사이에 두고 어떤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함께 어떤 '시간'을 만든다는 것, 말이 아닌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텍스트클럽은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듣고 적었던 말 중에 좋은 문장으로 남았던 것들을 남긴다. 힘들고 긴 긴 하루였지만, 뿌듯하고 벅찬 하루였음을 기억하기 위해.


함께 낭독하기 ⓒ 우주 OOZOO



"시와 나의 온도가 다를 수 있어요. 그리고 '시에 대한 열망이 가까워지기도 했다가, 느슨해지기도 하는구나'를 알았어요. 내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이 끈이 끊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결국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슬럼프를 이야기하며) 안 되는 리듬에서 잘 되는 리듬을 당기는 방법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은 루틴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시 쓸 때 어떤 음악을 반복하는 거죠. 그러면 길 가다 그 음악을 들으면 시를 써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대화를, 이런 공간에서 시간을 들여 한다는 게, 일상 대화랑 전혀 다른 형태잖아요. 지성과 감성을 모두 담은 대화죠. 저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하고요. 이 대화에서 느끼는 쾌감은 대체제가 없는 것 같아요. 삶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마냥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