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당신을 위한 기획 노트

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 04 <유희경과 밤> 기획자 후기 노트

by 우주 oozoo

(2020년 11월 12일)


나의 최애 시인과 함께 한 네 번째 텍스트클럽.


한 달이 지나서야 후기 노트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행사 끝내고 바로 메모를 해두었는데도, 정리하려고 할 때마다 머뭇거림이 있었다. 아끼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네 번째 텍스트클럽도 좋았다는 피드백이 대부분이라 기뻤다. 어떤 후기는 뭉클해서 엉엉 울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영감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기획하니까, 그런 지점에 닿아있는 후기가 몹시 소중하다. 뿌듯한 성취감과 기쁨을 주는 후기들.


텍스트클럽 04 <유희경과 밤> ⓒ 우주 OOZOO


기획의 컨셉은 산문집을 읽다가 떠올렸다.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은 시인이 10년 동안 모은 글이다. 까만 밤에 낱말 여러 개가 별처럼 흩뿌려진 내지가 있었고, 산문을 8편쯤 읽다 보니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낱말을 차곡차곡 모아 왔을 시인님이 그려졌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책이 낱말 모음집처럼 여겨졌고, 이왕이면 텍스트클러버가 다 같이 '밤'의 낱말을 '수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텍스트클러버와 더 가까운 거리감으로 대화하고, 책의 느낌과 분위기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 사회자 없이 시인 혼자 무대에 서길 바랐다. 그래서 이번 텍스트클럽은 무대, 조명 등이 조금 더 연극적으로 구성되었다. 지난 세 번의 텍스트클럽 무대가 단순한 북 토크 세팅이었다면, 이번에는 '시인의 책상'을 주제로 시각적인 임팩트를 주고 싶었다.


텍스트클러버와 이야기 나누는 중 ⓒ 우주 OOZOO


무대가 연극과 닮아있어 입퇴장도 조금 더 신경 썼다. 입장할 때에는 시인님이 다소 어두운 무대로 나가 외투를 벗고, 의자에 걸쳐두고, 자리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낭독을 시작했다. 낭독을 마치고 모든 조명이 들어온 뒤에 메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퇴장할 때에는 마지막 낭독을 마치고, 스탠드를 끄고, 자리를 정리하고, 의자에 걸쳐둔 외투와 산문집을 챙겨 들고 무대를 떠났다.


사실 무대 퇴장은 미리 합을 맞춰보지 못했다. 디렉션을 드리지 못해서 이 부분도 시인님 임기응변에 기대었다. 낭독을 마칠 때쯤 '앗, 어떡하지?'하고 당황할 뻔했는데, 스탠드를 끄는 시인님에게서 희망과 감동을 봤다. 수미상관의 센스. 행사를 무사히 그리고 완벽히 마쳤다는 생각에 뭉클했다.



나는 주로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이나 연결감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어떤 내용을 전달할 지에 따라 콘텐츠의 그릇(북 토크, 강연, 대담,...)을 선택하기도 하고, 그릇을 먼저 정하고 담을 내용을 만들기도 한다. 행사를 위해 했던 일을 적어보니, 내가 기획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1. 기획자는 행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준비 단계에서 갑작스러운 구멍이 발견되거나, 행사 중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연사에 관한 정보도 최대한 많이 수집해 스타일을 파악해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산문집 정독과 발췌독 5+번

산문집 출간 이후의 저자 인터뷰 읽기 (시간이 된다면 이전 인터뷰도 포함)

온라인 서점의 산문집 소개 상세페이지 읽기

레퍼런스 체크: 책을 주제로 한 행사, 또는 비슷한 목적으로 열리는 다른 행사를 눈여겨보자.


행사 전날 조명 테스트 겸 앉아 봄 ⓒ 우주 OOZOO


2. 모든 기획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기획자의 세계에 들어있는 모든 것은 그 세계의 완결성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서 일관된 논리 속에 존재해야 한다. 예전에 영감의 서재 팝업 이벤트 후기에서도 썼지만, 기획자는 행사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설계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그 시간, 그 자리에 바로 '그것'이 있어야 할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다.


1) 기획 뼈대 만들기

기획 컨셉 잡고 다듬기

컨셉: 독자와 함께 밤의 낱말 수집하기. 자기 전에 떠올리는, 밤마다 맴도는, 손끝에서 어른거리는 낱말과 문장을 수집하고 이야기해보자.

컨셉을 프로그램으로 변형하기: 90분을 어떻게 쪼개어 쓸지 결정하기. 누가,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프로그램: 독자가 미리 보내어 온 낱말과 사연을 읽고, 시인이 코멘트. 현장에 있는 독자도 말하게 한다. 시인이 책에 미처 담지 못한 낱말이 있다면 나눈다. 독자의 궁금증도 풀어준다.

메인 행사를 총 2개의 파트로 나누어 진행했다. 시인의 진행 능력에 100% 기대었다. 단단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행사를 열고 보니 사람들이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세심한 장치가 필요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기에 말하기가 부끄러웠다는 내용이 꽤 있었다. 다음에 비슷한 행사를 한다면 문자를 보내거나 미리 카드에 쓰게 하는 방식을 적용해보려고 한다.


마음에 딱 남은 장면 ⓒ 우주 OOZOO


2) 뼈에 살 붙이기: 머릿속에서 현실로

컨셉의 시각화: 컨셉과 프로그램에 맞게 무대, 객석, 전체 공간 분위기, 관객 동선 만들기

레퍼런스 체크

무대 이미지: 무대 전체가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인은 쓰는 사람이며 또한 읽는 사람이므로 '시인의 책상'을 중심으로 종이와 책이 함께 있는 이미지. 책상 위는 정돈되지 않은 질서가, 그리고 밤을 밝혀주는 스탠드가 있는 풍경.

오프라인 공간을 바탕으로 기획하는 사람의 경우,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수적이다. 특히 이번 행사처럼 매우 특수한, 사회자 없이 창작자 혼자 무대에 오르는 구성은 더더욱.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연극적인 무대가 어울리겠다는 판단이 섰고, 무대 구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간은 전체적으로 차분하지만 쓸쓸하지는 않은 분위기, 따뜻하지만 펄펄 끓는 뜨거움은 아닌 온도로 설정했다. 관객석도 무대의 연장선으로 놓고 이야기가 오간다는 컨셉을 유지했다.


공간 구현하기: 가구, 소품, 조명, 음악, 음향 등 각 요소가 공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나름의 방식으로 보여주기

무대 구현을 위해 가구, 소품 등 모으고, 무대에 올려 이리저리 꾸몄다. 연극 연출가가 된 심정으로 온갖 곳에서 온갖 것을 모았다. 사무실 책상 개조부터 선물 받은 핸드크림까지, 공공일호 곳곳 그리고 집에 있던 물품을 총동원했다. 이리저리 배치하고, 극장 이곳저곳에서 돌아보며 어느 한쪽도 비어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썼다.

조명은 설비의 한계가 있어 최대한 내가 원하는 형태에 근접하게 조정했다. 무대가 연극적이라 입퇴장 조명도 마치 연극무대처럼 암전부터 순차로 켜지도록 조이와 합을 맞췄다. 음악 역시 모두 내 손을 탔다. 공연장 오픈/클로징과 낭독 때의 음악도 '유희경의 밤'에 어울리는 분위기로 골랐다.


온갖 곳에서 모은 소품들. 롤도화지가 신의 한 수 였다 ⓒ 우주 OOZOO


3. 기획자는 이 행사를 누구보다도 제일 많이,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각종 마케팅 문구를 제일 잘 뽑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관객과 약간의 간극이 발생한다. 관객은 이 행사를 누구보다도 모르는 사람이므로, 관객의 입장에서 이 행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

또한 행사를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므로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과 나와의 이해도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만 100을 알고, 파트너들은 50을 안다면 행사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다. 기획안, 큐시트, 진행 상황 등을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공유하자. 부족한 것보다는 오버 커뮤니케이션이 낫다.

마케팅 문구와 상세 소개 문구 뽑고, 예약 페이지 셋업

각종 문서 작성, 업데이트, 공유

문어발 커뮤니케이션: 출판사, 시인, 팀(극장 매니저/음향 감독)에 상황 업데이트 하기, 의견 듣고 반영하기

음악/음향, 조명, 출연자(시인)에게 각각 디렉션 주기

공연장 오퍼레이션 총괄 매니징


행사 큐시트, 시인님 연필, 텍스트클러버 선물 ⓒ 우주 OOZOO


4. 기획자는 잡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큰 회사에 다니거나 팀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 있다면 패스. 그렇지만 나처럼 도와줄 동료는 한 명뿐이고, 1인 팀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짜치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 장점은 행사의 A부터 Z가 모두 내 손을 거치니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시간과 에너지를 상당히 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건물에 포스터를 둘둘 감아 '유희경 랜드' 만들기

티켓 오픈 후 지속적으로 SNS에 업데이트하며 티켓 팔기

음료 발주, 메뉴판 작성, 포스기 등록

티켓에 오늘 날짜 찍고 오늘의 도장 고르기 (* 음료 교환 시 확인용으로 도장을 찍는데, 그날 행사 컨셉에 맞추어 고른다.)


나의 손길로 완성된 유희경 랜드 ⓒ 우주 OOZOO



이번 텍스트클럽을 위한 모든 작업은 지난 세 번의 행사보다 훨씬 더 신경 썼기 때문에 더 고단했다. 그래도 즐거웠던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돋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나의 상상을 닮은 무대가 눈 앞에 점점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만들어낸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 뭐든지 열심히 하는 유노윤호 재질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선물로 받은 친필 문장 카드 ⓒ 우주 OOZOO


돌아보면 무모한 기획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관객이 올 지 모르는 상태에서, 관객의 이야기로 90분의 2/3을 채워야 하는 기획. 게다가 사회자 없이 90분을 혼자 진행하는 행사. 말도 안 된다고 거절하거나 말리지 않고 매번 '근사하네요'라고 피드백해주신 유희경 시인님. 생각뿐이었던 기획이 눈앞의 현실로 구현된 것, 그것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근사한 모습이었던 것도 시인님 덕분이었다.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


무대 위에서 빛날 근사한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과 마주 앉아 경험이라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객석의 근사한 당신을 위해. 나는 당신들을 위해 경험을 설계하는 사람. 모두에게 근사함을 선물할 수 있기를.



#보너스

리허설 하며 찍어둔 영상. 살짝 공개합니다.

리허설 낭독. 유희경과 꿀보이스의 밤 ⓒ 우주 OOZ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