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사랑의 모양도 백 가지’라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사랑은 모양은 하나’라고 믿을 때가 있었다. 수많은 연인은 하나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그 모양에는 차이뿐 아니라 우열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파이란>을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삼류 양아치 건달과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중국 여자, 이들이 서로에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 이해되지도, 그 모습이 아름답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본 <파이란>, 다행히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혈혈단신 한국을 찾은 강백란(장백지)는 강재(최민식)와 위장결혼을 한다. 사랑? 백란은 강재 증명사진 한 번 봤을 뿐이고, 강재는 이름을 빌려주고받은 ‘말밥’ 값이 더 소중하다. 얼마 후 강재는 백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백란이 머물던 곳으로 향한다. 강재와 백란이 처음으로 서로를 향하는 순간이다. 강재는 백란이 남긴 흔적을 보며,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늘 천대받던 자신도 백란에게만큼은 ‘친절한’ 사람인 걸 알게 된다.
백란은 한국에서 와서 갖은 수모를 당하지만, 찬 바람만 부는 건 아니었다. ‘강재’란 이름만 들어도 수줍어하는 백란의 모습은 그녀의 사랑이 따뜻함을 보여준다. 경수(공형진)가 ‘남편도 너 보고 싶데’란 말을 하자. 고개를 숙이며 살며시 웃는 백란의 모습은, 아! 강재는 백란의 부치지 못한 편지 앞에서 오열하고, 시뻘게진 눈으로 노래하는 백란을 바라보며, 침묵으로, 뒤늦은 사랑을 전한다. 강재와 백란,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마음이 통하는 찰나다.
<파이란>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이 한 곳을 향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을 말한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상대에 오롯이 집중할 때 더욱 그렇다. 이는 백란과 세탁소 아줌마(김지영)의 대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세탁소 뒤뜰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여인을 잠시 만나본다.
세에~탁!(세탁소 아줌마) / 세에~탁!(백란) / 세에~탁! / 세에~탁!
그치. 어서 오세요. / 어서 오베세요.
하하, 아이고.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하하, 아이고. 내가 죽겠네. 진지 잡솼어요? / 힌지 마릅삽아노?
아이고, 내가 죽겠다. 아고, 죽겠어. / 진지 잡안산어요?
진지 잡솼나요? / 힌미 합샀사요?
얘를 언제 가르쳐 일 시켜 먹나. 앓느니 죽지. 그만둬 그만
답답한 아줌마는 포기하려 한다. 백란이 한국말을 배울 것 같지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때 백란의 한 마디, “곰합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은 통했고, 어느덧 한 곳을,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 감사하고 위로하는 존재가 된 셈이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모양도 백 가지’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아니 둘셋으로, 아니 열로는 묶을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봄날에도, 내게 닿은 햇살은 따뜻하다. 고맙습니다!
둘이 조금 일찍 서로 알고, 같은 길 갔으면 좋으련만. 나도 지금 늦은 만남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을까.